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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슬영 Nov 05. 2022

너와 나의 거리 빵 미터 - 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한참을 달려 현구네 집 앞에 도착했다. 새 옷이 그새 비에 젖었다. 우산살 한쪽이 구부러져 덜렁덜렁하더니 비가 다 들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빗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현구야아아아! 방, 현, 구우우우!”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상했다. 현구도 분명 집으로 갔을 테고, 그럼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리가 없었다. 현구 엄마가 온종일 짐을 싸도 쌀 게 더 남았다고 투덜댔다는 얘길 현구한테 들었던 터였다. 현구가 잠깐 어딜 나갔더라도 현구 엄마는 집에 있는 게 맞았다. 문득,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뭔가 저 문 안쪽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휙 스쳤다. 때마침 바람이 휭 불었다.

  삐그덕.

  대문이 살짝 열렸다. 현구 엄마는 대문을 잘 열어 두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얼른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 붙이지 않은 커다란 상자 하나가 마당 가운데 떡하니 나와 있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현구야아아아!”

  마루 유리문을 밀며 안에 대고 소리쳤다. 두근두근, 심장이 울려 대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누고? 치국이가?” 하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현구 목소리였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한껏 긴장했다가 갑자기 풀려 버리니 꼭 큰 파도 하나가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서 있을 때처럼 몸이 스르륵 밀려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니 어딨노? 와 대답도 안 해가꼬 사람을 놀래키고 그카노!”

  “내에? 똥 누는데에. 와 그카는데? 먼 일 있나?”

  “똥이나 다 싸고 나온나.”

  나는 무릎걸음을 걸어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젖은 바지 때문에 거실이 온통 흙탕물이 될 것만 같았다. 

  뚜두두두, 신호음이 울렸다. 

  “우리 치국이, 무슨 일?”

  상쾌 발랄한 누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턱 놓였다. 나는 얼른 허리춤에 끼워 넣었던 토우를 꺼내 들었다.

  “누야, 있잖아. 내가 억수로 오래된 거 같은 토우를 하나 찾았거덩. 보물 같다, 보물!”

  나는 현구와 뒷산에 올라갔던 것부터 시시콜콜 다 얘기했다. 토우의 생김새, 느낌, 머릿속을 웅웅 울리던 목소리까지. 한참을 묵묵히 듣던 누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찾아볼게. 뭐, 자료 같은 게 있는지. 누나 이제 수업 들어간다.”

  뭔가 대단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맥이 쭉 풀렸다. 찾아보겠다니, 뭔가 엄청난 보물이 분명한데 그저 찾아보겠다니! 대학에서 제일 유명한 보물 전문가를 당장 불러다 이 엄청난 물건을 보여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찾아보겠다니! 아, 대학엔 보물 전문가가 없는 걸까? 어쨌든, 누나도 결국 어른이 되고 만 거다. 어른들은 뭐든, 일단 나중에 하겠다거나 나중에 해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니까. 

  “에이, 누나랑 내 마음은 한 백만 미터 되지 싶다.”

  “니 뭐 하노? 백만 미터가 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현구가 물었다. 화장실에서 힘깨나 쓴 모양이다. 

  “백만 미터가 뭔데?”

  “어? 아니 아니 그건 됐고. 빵, 일로 쫌 앉아 봐라.”

  무릎걸음이고 뭐고 나는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현구를 끌어내렸다.

  “이기, 아무래도 이상하다. 니도 분명 들었다 캤제? 니 소원이 뭐고오오, 이카는 거?”

  “아니.”

  “뭐? 아니?”

  “무엇을 원하니이이이, 이캤다꼬.”

  “야! 그기 그거지!”

  현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됐고! 빵, 우리 아까맨치로 이거 한 번만 더 만져 보자.”

  “또오? 에이, 내는 싫다.”

  “와?”

  “좀 무섭드라. 귀신 나올라 카는 거 같았다꼬.”

  현구 말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게 예사소리는 아니었고 갑자기 천둥에 번개까지, 비가 오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만져 보자. 응? 내랑 니랑 둘 다 손을 대야지 그기 나타나는 것 같단 말이다.”

  “잔칫꾹. 니 도대체 무슨 소원 빌고 싶어 그카는데?”

  현구 물음에 흠칫 놀랐다. 예리한 녀석.

  “뭐, 그냥, 억수로 대단한 거는 아니고, 그러니까…… 이제 생각해 봐야지!”

  사실은 내일 새벽부터 엄청난 태풍이 오게 해 달라고 할까, 잠깐 상상은 해 봤다. 가능하면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오고 바다를 뒤집어 버릴 만큼 바람이 불어서 당분간은 섬에서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요즘 들어 제일 많이 하는 상상이다.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거, 아무도 이 섬에서 육지로 나갈 수 없게 되는 거. 

  “무슨 소원 빌 거냐니까?”

  “벼, 병원! 병원 억수로 큰 거 하나 지어 달라꼬!”

  키햐, 말해 놓고 나니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머리에서 이런 생각이 툭 튀어나올 줄이야! 그래, 병원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건데 여태 그 생각을 못 하고 살았다. 큰 병원이 생기면 인슐린을 못 구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는 일도 없을 거고, 현구한테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바로 해결될 거고, 그럼 현구가 굳이 큰 도시로 가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거다. 나랑 여기서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때 함께 육지로 나가면 되는 거였다.

  “다 니를 아끼는 마음 아니겠나.”

  내 마지막 말이 감동적이었던 건지, 병원 지어 달라는 소원이 감동적이었던 건지 현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쭉 내밀더니 방바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순둥이 같은 녀석.

  “할 끼가 말 끼가?”

  일부러 더 크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현구는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와?”

  그때 쩌어억, 쿵! 어딘가로 큰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현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유리문이 흔들렸다. 나는 토우를 다시 허리춤에 끼우고 나와 마루 끝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처마 안으로 비가 들이쳐 신발들이 홀딱 젖었다. 그때 마당에 놓여 있던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상자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비에 젖고 말았다.

  “근데 빵, 저거는 뭐고?”

  “나도 몰라. 너무 무거버서 못 옮겼다. 쨍그랑쨍그랑 소리 나는 거 보니까네 냄비랑 뭐 그런 거 넣었던 거지 싶다. 엄마가 누구 준다카는 거 같던데.”

  “아줌마는 어디 가셨는데?”

  “몰라. 나는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고 엄마는 뛰어나가고. 그게 끝이다.”

  “아저씨는? 너거 아빠 오늘 배…… 야, 클났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산도 쓰지 않고 맨발로. 나도 얼른 달리기 시작했다. 현구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속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달려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마을회관을 돌아 선착장으로 달리는 현구를 보며 생각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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