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지식의 3요소를 참, 믿음, 정당화로 정의한다. 어떠한 명제가 지식이 되려면 그것이 참이어야 하며(True) 그 명제를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Belief) 그 믿음이 정당화되어야 한다.(Justify) 앞선 3가지 조건의 앞 글자를 축약하여 이를 지식의 "JTB 조건”으로 총칭한다. 즉, 지식(앎)은 JTB 조건을 만족해야 성립된다는 논리이다. 1962년 게티어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한다. 이 2.5페이지짜리 논문은 인식론이라는 철학분야를 뒤흔든다.(이 한 편의 논문으로 게티어는 철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겼으며, 종신 교수가 되었다.) 게티어는 위의 JTB조건을 만족하지만, 앎(지식)이 아닌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게티어의 주장을 간단한 예시로 살펴보자.
철수와 민수는 입사를 위한 면접시험을 보고 있다.
철수는 면접관이 민수를 합격시킬 것이라는 말을 엿들었다.
철수는 민수의 주머니에 동전 10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철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명제 1 : '일자리에 합격하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들어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니 면접관이 실제로 입사를 결정한 사람은 철수였다. 그리고 철수 자신은 몰랐지만
철수의 호주머니 안에도 동전이 10개 들어 있었다.
1. 명제 1은 참이다. 철수가 뽑혔고 호주머니에 동전 10개가 들어 있었다. (True)
2. 철수는 명제 1을 믿는다.(Belief)
3. 철수의 믿음은 실제 면접관에 의하여 뽑혔으므로 정당화되었다.(Justify)
이와 같은 반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자리에 합격하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들어있다.'라는
명제는 플라톤의 JTB조건을 모두 만족하였지만, 이를 지식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게티어의 논문에는 2번째 반례가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JTB 조건은 지식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어도,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저 사소한 개념적 퍼즐
혹은 말장난으로 보일 법한 이 사안은, 시간이 갈수록 철학계의 큰 사유의 파문을 던진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은 반례를 차단하기 위하여 JTB 조건을 강화하거나, 혹은 JTB 조건 외의 제4의 조건을 추가할 때마다 예측하지도 못했던 온갖 부적합한 귀결들이 튀어나오는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시 플라톤의 지식의 3요소라 불리는 지식의 필요조건에 대해 살펴보자. 플라톤이 지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JTB조건은, 그것이 참이어야 하며(True) 그 명제를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Belief) 그 믿음이 정당화되어야 한다.(Justify)
그렇다면 플라톤이 지식으로 분류한 조건은 실증적 지식을 제외하고는 (실험과 증명을 통한 참) 그 어느 것도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한다.(수학과 과학을 제외한) 게티어는 2.5페이지의 짧은 논문으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의 근본적 오류를 지적한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 이를 정리하자면, 지식은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하여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플라톤이 제시한 필요충분조건(JTB)은 지식에 대한 근본적 사유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실험을 통한 실증적 결과를 제외한(수학, 과학)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플라톤의 JTB 이론에 따르면, 수학을 제외한 현재 학문(지식)으로 분류하는 문학과 철학(인문학)은 지식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이 인류에 미친 영향력과 기여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결국 수학과 과학처럼 실증적으로 증명되어 갱신되는 방식의 지식이 아니어도, 지식의 필요 충분요건으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가치는 결과적으로 인류(인간)를 이롭게 함이어야만 한다.
참의 명제를 충족하는 조건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가치는 (수학과 과학을 제외하고는 참이라는 명제를 실증하기 어렵다.) 지식이라 분류되는 이론이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한 선한 목적이어야 하며, 그 목적성이 충족된다면 인류(인간)는 기꺼이 이를 지식으로 분류하여 이롭게 활용할 수 있다.
명리학을 비롯한 기타 철학은 통찰을 통하여 가치를 증명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실증되어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게티어의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라는 질문을 명리학에 대입해 보자.
甲木參天 脫胎要火 (갑목참천 탈태요화)
갑목은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솟구치며,
태반을 벗기 위해 화(火)를 필요로 한다.
-적천수, 갑목
적천수는 명리학의 바이블로 불리는 필수 고전이지만 앞서 소개한 예시(명제)는 플라톤의 JTB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갑목은 하늘로 솟구친다.'라는 명제는 추상적 관념으로 참과 거짓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명제로 성립할 수 없다. 또한 갑(甲) 목은 특정 물질이 아닌 10 간지 중 갑(甲) 일간을 형상화한 개념이며, 하늘을 찢는다는 의미의 참천(參天) 또한 물상을 형상화한 은유적 표현이기에 명제로 성립하지 않는다.
명리는 사실을 기술한 명제가 아닌(실험을 통한 실증적 결과치) 상징과 은유로 이루어진 표현이며 이는 의미를 내포한 철학에 가깝다. 그러므로 명리학은, 참(True)과 거짓(False)의 판별이 불가능하다. 토극수(土剋水)나 금생수(金生水)라는 개념 또한 명리학의 명제로는 타당하나, 참과 거짓의 실증적 판별이 불가능하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라는 물상은 우주의 운동작용을 물질로 형상(形像)화한 은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리학은, 참과 거짓으로 판별될 명제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플라톤이 제시한 JTB조건을 충족하는 지식이 아니다.
명리학도 문학, 철학과 함께 정당화된 참된 믿음(지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지식이 아님에도, 문학과 철학(인문학)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학문으로써의 가치를 의심받지 않지만, 명리학은 지식 분야(수학, 과학)의 종사자에게 샤머니즘 혹은 미신으로 치부되며 공격받는다. 이는 과학의 특성인 "증명"이 가시적으로 증명된 결과치를 의심 없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현답이 있어 인용으로 대신한다.
"사과 두 개와 사과 세 개를 더하면, 사과 다섯 개가 된다. 이것을 산수로는 "2+3=5"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2+3=5"라는 등식이 옳다는 것을 사과를 더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서 "2+3=5"라는 수학적 등식의 특성이 사과의 특성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사과 대신 배 또는 감을 썼어도 결과는 똑같다. 수학적 등식이 가진 수리적, 논리적 특성은 그것을 파악하는 데 사용한 도구의 특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마찬가지로 정신계와 우리 언어세계의 특성이 비록 물질계의 일부인 뇌세포의 작용을 통해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물질계의 특성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이유가 없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홍창성 지음-
또한 명리학이 주술적 의미로 오해받는 이유는 임상을 통한 개인(역술가)의 주관적 통계와 주관적 해석(직관)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은유되어 수식된 학문은 개인의 특성에 따라 주관적 해석이 가능하다.
예) ’ 갑목은 하늘로 솟구친다.'라는 문구를 '갑목일간들은 (다른 일간과 비교하여) 키가 크다'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필자의 해석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갑목의 성질을 주변에 자신을 드러내어 뽐내고픈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해석의 다양성과 주관성)
(오행 목 참조)
명리학은 각자 다양한 해석과 임상을 통한 주관적 통계값을 얻게 되므로, 개인(역술가)마다 다양한 의견을 지닌다. 역술가의 주관적 견해(해석, 논리)는, 내담자의 입장에서 지식이라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우연적 요소가 첨가되어 명리학을 지식으로 믿도록 만든다. 명리학은 각자 다양한 해석과 임상을 통한 주관적 통계값을 얻게 되므로, 개인(역술가)마다 다양한 의견을 지닌다. 역술가의 주관적 견해(해석, 논리)는, 내담자의 입장에서 지식이라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우연적 요소가 첨가되어 명리학을 지식으로 믿도록 만든다.
명리학도 플라톤의
JTB조건을 충족하는 경우가 있다.
"당신 동생은 내년에 이혼한다."라는
예언적 통변이 실제 적중하는 상황이다.
명제 1: 당신 동생은 내년(2025년)에 이혼한다.
실제로 동생이 이혼했으므로 참이며(True)
당사자(형, 언니)가 이 사실을 믿고(Believe)
법적절차를 통하여 정당화되었다.(Justify)
예시를 든 역술가의 통변은 플라톤의 JTB조건을 충족하였지만, 이는 게티어가 제시한 반례와 같은 사례이다.
명제 1 : '일자리에 합격하는 사람의 호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들어있다.'
철수가 생각해 낸 면접에 합격하는 사람의 조건인 '호주머니 속 동전 10개'가 주관적인 통계(직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명제인 것처럼, 역술가가 이혼한 동생의 사주에서 발견한 명리학적으로 이혼할 가능성이 있는 명주의 특성도 역술가 본인의 주관적인 통계(직관)에 의존한 결과치이다. 예를 들어, 역술가가 동생의 사주에서 배우자를 뜻하는 일지 재성이 2025년(을사년) 세운의 글자와 충을 당하거나, 혹은 일간이 세운과 쟁합(투합)을 하는 상황을 보고, 명주의 이혼을 예언하였다고 가정하자. 역술가가 이혼을 판단한 근거가 “개인적 직관(통계)”이라면 철수의 경우에 해당되므로 이는 지식이 될 수없다. 그의 판단이 지식이 되려면, 일지 재성이 충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이혼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Justify)
사과가 떨어지는 상황을 보고 '모든 질량을 가진 물질은 서로를 당기는 힘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관적 직관을 실증하여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주관적인 직관(해석)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주머니에 동전 10개가 들어있는 사람은 면접에 합격한다'는 명제가 참일 수 없듯이, '일지 재성이 충을 당한 사람은 이혼한다'는 명제는 참이 될 수 없다.
지식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명리학을 지식으로 분류하여 숭배하고 싶은 욕망은 지식은 곧 권력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실제 단정적 예언을 하여 분석이 적중한 역술가는 권력(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역술가의 단정적 예언은 주관적 통계(직관)에 의한 결과물이므로, 반복적으로 완벽하게 적중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한 정보화 시대에 지식은 더 이상 권력이 되지 못한다. '2018년 월드컵 우승팀은 프랑스이다'라는 명제는 JTB조건을 충족한 의심할 바 없는 지식이지만, 이 지식으로 인하여, 권력을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없다. 수많은 기존의 정보(지식)를 클릭 한 번으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화시대에서. 나와 인류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지식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명주가 2025년에 이혼한다는 예언을 적중시켜 JTB조건을 충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명주에게 아무런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없다.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권력이 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 정보화 시대의 진정한 지식은 “공유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여부이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있는가'보다 '주어진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지식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설사 명리학에서 100% 예외 없이 적중하는 특정한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하더라도('일지 재성이 충을 당하면 반드시 이혼한다'는 것이 100%의 확률로 발생한다 해도)'내년에 이혼한다'는 단정적 예언은 명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혼이라는 흉사를 피할 실용적인 조언을 줄 수 없다면, 이혼할 사실을 미리 아는 것은 명주에게 전혀 이롭지 못하다.) 지식과 학문은, 숭배하고 추앙되는 것이 아닌(권력) 인간을 이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우주와 인간 만물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한 학문은 권위(권력)가 아닌, 도구로서 인간에 의해 활용되어야만 한다. 지식을 활용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정보화 사회는 이를 현실화하도록 돕는다. 실제 교육의 미래 또한 지식을 주입하는 방식에서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인간에 의해 추앙되어 군림한 지식은 빠르게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명리학은 물질과 에너지의 운동 원리를 물상화하여
인간의 삶에 적용한 학문이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명리”라는 학문을 추앙하고 맹신하는 것이 아닌, 명식을 통하여 나의 기질과 성향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