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안꾸 교본 제1장 : 낡은 티셔츠 한 장

by Asparagus




뉴욕에서 몇 달간 지낸 적이 있다.


어떤 코스를 수강하러 간 거였는데,

수업이 끝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긴 늘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늘 같은 루트를 돌았다.


공원 벤치, 커피숍, 허드슨 강.

이 세 군데를 천천히 돌며

딱히 할 일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의 나는

책보다 사람들의 옷을 더 열심히 읽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걸린 낡은 티셔츠.

프린트는 바래 있었고, 목은 살짝 늘어났다.

그런데 묘하게 멋있었다.


새 옷에서는 절대 날 수 없는 공기.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섞인 재즈 같은 기분.


힘을 준 흔적은 없는데,

시간이 남긴 흔적은 분명히 있었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장면을

도쿄에서도 자주 본다.


새 옷 같지 않은 티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티셔츠는 낡았는데, 낡아 보이지 않았다.

힘이 빠졌는데, 오히려 단단해 보였다.


아마도

그게 도시가 입혀주는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어패럴 회사에 다니며

이 무드를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배웠다.


바로 抜け感(ぬけかん).


한국말로 옮기면

‘꾸안꾸’, 혹은 ‘힘을 뺀 세련됨’쯤 된다.


질 좋은 재킷 안에

무심히 구겨 넣은 헐렁한 티셔츠.


칼같이 재단된 바지 위에

프린트가 거의 사라진 티셔츠.


풍덩한 가디건 속에서도

끝내 빛바래버린 티셔츠 한 장.


이게 내가 관찰한

도쿄 여자들의 꾸안꾸 공식이다.


그녀들은 알고 있다.

세련됨의 마지막 한 끗은

비싼 가방도, 명품 구두도 아니라는 걸.


꾸안꾸의 킥은 언제나

살짝 헤진 티셔츠 한 장이다.


그건 마치

요리 마지막에 뿌리는 소금 같다.

없으면 심심하고,

있으면 전체의 결이 살아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꾸안꾸를 하고 싶다면

낡은 티셔츠 한 장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제발 버리지 말자.

비싼 명품 티셔츠가 아니라면

세탁기에 마구 돌리고 또 돌려서

자연스럽게 빈티지로 길러보자.


왜냐하면 요즘

빈티지 티셔츠는 럭셔리다.


1975년 롤링스톤즈 재팬 투어 티셔츠라면

그건 옷이 아니라

그 시대의 땀과 음악, 젊음을 통째로 품은 증거다.


샤넬 로고 티셔츠가

“나는 돈이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빈티지 밴드 티셔츠는

“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십만 원,

때로는 백만 원을 훌쩍 넘는다.


작은 고백 한 줄이

희소성이라는 기묘한 화폐를 만나

증권처럼 거래된다.


그러니 빈티지를 사느니,

차라리 내가 기르는 게 낫다.


나 역시 빈티지에 꽤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결국 첫 입문을 했다.


나의 첫 빈티지는—

누구나 집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귀여운 미키 티셔츠였다.


그걸 산 건 십 년도 더 전.

9만 원대,

딱히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가격이었다.


그땐 그냥 예뻐서 샀다.

그런데 집에 와서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왜 이걸 샀지…”

패션은 원래

충동과 후회의 사이를 오간다.


그런데 십 년 가까이 입고 나니

계산기가 자동으로 속삭였다.


“이미 원가절감은 끝났습니다.

충분히 뽕 뽑으셨습니다.”


정말로 그 옷은

내 인생의 효자템이었다.

너무 입어서

종잇장처럼 얇아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초코우유를 쭙쭙 마시고 있었고,

옆에서는 막 돌 지난 아기가

손을 쭉 뻗었다.


“안 돼, 안 돼!”

초코우유를 사수하려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거실 한가운데

초코우유 분수쇼가 열렸다.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

“초코우유는 잘 지워지겠지” 하며

티셔츠를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하루를 방치했다.


그런데—

세탁기에서 나온 미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그날 나는

눈물을 머금고

티셔츠를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십 년을 함께한 친구와의 이별.


거실 한쪽에는

태극기 대신

초코우유 국기가 펄럭였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다시 떠나야 한다.


나의 미키를 찾아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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