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전에,
친구와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다
지갑을 보러 갔을 때였다.
마르니 매장에서 그녀는
딱 마음에 드는 컬러의 지갑을 발견했다.
표정은 이미 결제까지 끝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계산대로 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가방을 고쳐 메며 조용히 말했다.
“이건 다음 주에 사야 해.”
왜냐고 묻자,
잠시 숨을 고르고 이렇게 덧붙였다.
“몰라? 지갑은 무조건
일립만배일에 사야지.”
…뭐라고?
일립만배일.
한자로 쓰면 一粒万倍日.
한 톨의 씨앗이
만 배로 불어난다는 날.
이날 지갑을 사면
돈도 그렇게 불어난다는,
아주 그럴듯하고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설정의 날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지갑은 가죽이고, 씨앗은 벼인데…’
라는 아주 쓸데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 지갑이 대체
어디서 수확을 도와준다는 걸까.
지갑 농사라도 짓는 건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 정도의 눈치는
이제 나도 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천사일이라는 날도 있고,
호랑이날도 있고,
뱀의날도 있다.
처음엔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전부 나름의 논리와
제법 정교한 서사가 붙어 있다.
이 도시에서는
날짜조차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날씨의 신도 믿는 나라다.
그러니 날짜쯤이야
충분히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일 비슷한 개념이지만,
여기의 기일에는
성격이 있고,
성격에는 이야기와
약간의 믿음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놀랄 만큼 진지하게 믿는다.
호랑이는
하루에 천 리를 갔다가
다시 천 리를 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호랑이날에 쓴 돈은
멀리 나갔다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논리다.
천사일은
하늘이 만물의 죄를 용서하는 날이라서
뭘 해도 좋다고 한다.
지갑을 사도 되고,
고백을 해도 되고,
아무튼 대체로
망하지는 않는 날이다.
실제로 길을 걷다 보면
복권점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오늘은 호랑이날입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거의 명령에 가깝다.
회사 동료에게
지갑을 언제 샀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일립만배일에 구입했죠.”
이쯤 되면
지갑의 출생신고서 같다.
브랜드보다 중요한 건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언제 태어났느냐다.
처음엔 솔직히 좀 웃겼다.
미신 같고, 귀여웠다.
호랑이가 대신
송금해 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도시에서는
그 믿음이 꽤 단단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일본은
어릴 때부터
‘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회다.
물건을 사는 날,
무언가를 시작하는 날,
혼인신고를 하는 날까지.
무엇이든
시작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갑을 사는 행위도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작은 의식이 된다.
그리고…
나도 결국 물들었다.
호랑이날이 오면
“오늘쯤이면 하나 사도 되지 않을까” 하고
카드를 꺼내 든다.
그 돈이 돌아왔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이다.
아마 그 호랑이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천 리쯤 떨어진 길을
아주 성실하게 걷고 있을 것이다.
급할 것 없다.
이것도 일종의 투자니까.
지갑은 이미 샀고,
호랑이는 아직 출발 중이다.
아니면 휴게소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언젠가는 온다.
그게
이 도시의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