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기억.4

by 이대연

신지 솔은 자중시켰다. 그러나 모랑은 집요하게 의심을 부추겼다. 신지 솔은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가 점차 또렷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진을 잃을지 모른다. 기억의 회복으로 인한 것이든 모랑의 탄핵으로 인한 것이든 모두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도진의 출입을 감시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하고 한편으로는 모랑의 침소를 자주 방문해 질투와 욕망을 회유하고 진정시켰다. 신지솔의 방문이 잦아지자 모랑은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향했다고 쉽게 믿어버렸다.


그는 용맹했으나 간교하지는 못했다. 그녀를 안을 때마다 마음속 칼날이 무뎌졌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른 질투의 불꽃이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구마부리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병권이 없는 그로서는 언제나 모랑이 마음에 걸렸다. 도진의 등장으로 그간 모랑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지 솔과 도진을 갈라놓으려는 모랑의 이간책이 염려스러웠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었다.


도진과 모랑이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서서히 약화되기를 기다리면 그의 차례가 올 것이라 믿었다. 아직 성급히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마한의 연합국들이 움직일 기미가 보였다. 마한의 원병이 오기만 한다면 권력의 무게는 외교를 맡은 그에게 기운다.


모랑의 병력이든 도진의 무력이든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구마부리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모랑이 이간책으로 신지 솔과 도진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니, 이이제이로 그들 모두를 올무에 몰아넣으리라. 그는 수하에게 은밀히 도진의 암살을 지시했다. 정말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심지에 불꽃만 당겨주면 불은 알아서 짚단을 태울 것이다.


부리는 다시 구마시루를 불렀다. 그에게 꼬리를 붙여두기를 잘 했다 싶었다. 권모술수에 능한 간자의 우두머리가 이번에는 어리숙한 도진을 이용해 또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려는 듯했다. 이제 각자도생의 시기라 이건가….


“니리므 모랑이 무모한 결단을 내린 듯하구나.”


구마시루는 눈을 끔벅거리며 부리의 수를 살폈다. 부리는 냉정하고 명민했으나 오만했다. 구마부리가 아는 것을 그도 알고, 셈하는 것은 그 역시 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이란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번에는 따라가주기만 하면 될 듯했다.


“그냥 두시지요. 니리므께 손해 날 일이 아닙니다.”


구마부리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구마시루를 통해 은근히 알려 도진과 모랑의 불화를 키우려 한 그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원하신다면 니리므 도진께 경계하시라 연통을 넣겠습니다.”


구마시루는 귀를 밟히고 있는 것까지 아는 듯했다. 그러나 이 거리낌 없는 언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리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이익을 논하는 건 소인배들의 일 아니겠는가. 항상 주위를 경계하시라 언질을 드려라.”


태연한 척 말했지만 구마부리는 자신의 수가 간파당한 것에 속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조만간 천한 간자의 목을 떼어내리라 마음먹었다.


공손히 물러나온 구마시루는 도진을 찾았다. 모랑이 보내든 부리가 보내든 자객은 미련을 벗지 못하고 좌고우면하는 도진의 결단을 재촉할 것이다. 쉽게 당할 위인이 아니니 미리 알릴 필요는 없었다. 다만 도진의 마음에 따라 탈출 시점이 갑자기 닥칠 수 있어 미리 도주 경로를 알릴 필요는 있었다.


위례홀에는 소문을 내고 연줄을 대 사람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도진은 돌아가 전공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 그 말을 타고 백제라는 하늘을 날 것이다.


“초병과 사공은 매수해 두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저를 찾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음은 제가 알아서 준비해 놓았습니다.”


한 마디면 족했다. 귀가하는 길에 눈발이 날렸다. 이번 겨울에는 검가람에 얼음이 얼리라. 길조였다. 구마시루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구마시루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식솔 중에도 숨이 붙은 이가 없었다. 니리므 구마부리의 오만함은 권력이라는 기반 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오만해도 좋았다. 그러나 구마시루는 아니었다. 그는 수만 가지 변수를 계산했으나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망각했다.


그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자신의 명민함에 취한 구마시루는 너무 일찍 발톱을 드러내고 너무 쉽게 방심했다. 달빛을 받은 시신이 서늘하게 푸른빛을 뗬다.


내막을 알 리 없는 도진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허둥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구마시루는 자세한 탈출 경로를 일러주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한 듯했다. 도진은 뒤를 살폈다. 아직 따라붙은 자는 없었지만 오래지 않아 추적자들이 그의 행방을 찾아낼 것이다. 살인범을 얌전히 놓아 보낼 리 없었다. 게다가 어라구마의 목전에서 니리므를 살해한 자였다.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반역이었다. 기묘한 일치였다.


그가 궁에서 자객과 모랑을 살해하는 동안 이곳에서 또 누군가 구마시루를 살해했다. 탈출을 결단한 순간 조력자가 사라졌다. 어쨌거나 가만히 앉아 추적자들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도진은 뛰기 시작했다. 강으로 가야 했다. 그곳으로 가면 살 길이 열릴지 몰랐다. 어둠속을 달리는 발이 허방을 딛는 것처럼 휘청거렸다.


자객이 든 것은 이슥한 밤이었다. 궁을 지키는 전사들의 야경 소리가 들리곤 했다. 자객이라기엔 실력도 의지도 없었다. 허약한 자였다. 그는 오로지 니리므 구마부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목숨을 구걸했다. 죽였다. 모랑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모르는 척했지만 그의 모략과 비방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금도를 넘었다. 도진 자신을 죽이거나 구마부리를 차도살인하기 위한 계책이 분명했다. 자객의 피가 묻은 칼을 든 채 그대로 모랑을 찾았다. 충성심 강한 모랑의 부하들이 간혹 길을 막았으나, 죽였다. 어라구마의 친위가 그를 막아섰지만, 역시 죽였다. 모랑과 신지 솔이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막 잠에서 깬 듯했다. 신지와 니리므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솟았다. 모랑이 저항했다. 칼을 잡을 겨를이 없어 맨손이었다. 먼저 손가락이 잘렸다. 다음으로 팔이 잘렸다. 마지막으로 목이 떨어졌다.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신지 솔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여기저기서 호각이 울리고 도주로가 차단됐다. 간신히 강변에 이르렀지만 경계가 삼엄했다. 발각되지 않고 도강하기는 불가능했다. 추적자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진은 침착하려 애쓰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교전보다 신속, 그리고 도강.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도진은 그대로 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전계획이란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는 법이었다. 저지하는 전사를 베는 동안 다른 하나가 달려왔다. 시간이 지체되며 호각이 울렸고, 금세 포위되었다.


구마의 전사들도 쉽게 달려들지 못했지만 도진 역시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르지 무인으로서의 투지뿐이었다. 다만 싸우다 죽겠다는 격렬한 본능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림자들이 서로 뒤엉켰다. 달빛을 받은 칼날이 간혹 반짝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네가 아는 대로다.”


돼지기름에 심지를 박아 불을 붙인 호롱불에서 그을음이 검게 올랐다. 어둠을 밝히기보다는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도 빠르게 모습을 바꿨다. 도진의 얼굴에 드리운 명암이 일렁여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소두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구드레의 유고로 군영을 통솔하고 있던 소두락에게 강 건너 구마국 병사들의 수상한 동향이 보고됐을 때, 병사들을 무장시켜 전투에 대비하며 적진을 주시했을 때, 멀리 한 사내가 적진을 교란시키는 것을 보았을 때, 소두락은 직관적으로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수많은 구마 전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가 도진이라는 것, 그리고 구마국 진영의 전열이 무너졌다는 것. 소두락은 지체하지 않고 일제히 뗏목을 띄워 병사들을 도강시켰다. 한꺼번에 모두 건널 수는 없었다.


병력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했지만 구마국 진영은 서둘러 전열을 갖춰 선발대의 도강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후속부대는 보다 수월하게 도강했다. 일 년여 간의 교착 상태가 단 하룻밤 만에 무너졌다.


소두락은 강을 건너자마자 도진을 찾았다. 팔과 다리에 상처가 있었으나 위중해 보이지 않았고 매우 지쳐 보였으나 생기가 넘쳤다. 소두락이 웃었다. 그러나 도진은 무표정했다. 소두락은 서운했지만 너무 지쳤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강을 건넌 십제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어라구마의 궁이 침탈당했다. 살육이 자행됐다. 일 년에 걸친 정벌이 하루 만에 완성된 셈이었다. 그러나 신지 솔과 니리므 구마부리는 없었다.


“이만 가서 쉬거라. 잔당을 토벌하는 일도 수월치 않을 것이다.”


전말을 듣고도 미적대는 소두락을 보고 도진이 말했다. 무표정했다. 소두락은 또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일어나 예를 갖추고 막사를 나왔다. 아직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교교했다. 소두락은 잠시 달빛에 취해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옷깃을 여몄다. 마음이 시렸다.



*


동굴 안은 어두웠다. 허공에 먹을 뿌려놓은 듯 검고 짙었다. 어둠 속에서는 추위가 더욱 또렷했다. 신지 솔은 가슴을 풀어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십 수 명의 전사와 구마부달이 있었으나 모두 검을 뿐이었으므로 부끄럽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몸이 떨리는 것은 가슴을 드러낸 수치 때문이 아니었다.


생사를 오가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고 나라와 백성을 잃은 군주의 참담함이나 하룻밤 새에 겪어야 했던 무수한 죽음의 참혹함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한기 때문이었다. 견딜 수 없는 오한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도진이 떠올랐다. 애초에 그를 거둔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믿은 것이 실수였을까? 그도 아니면… 사랑한 것이? 추위에 언 젖꼭지를 빠는 아기의 입놀림이 소스라치게 아팠다.


턱끝에 맺혀 떨어진 눈물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그러므로 입술을 오물대며 아기가 빠는 것은 젖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신지 솔은 가만히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수색이 뜸해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구마부리는 선잠이 든 듯했다. 전사들은 그녀를 막아서거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아마 여인에게 묻기 거북한 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고 생포되어 폐주의 치욕을 당하느니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은 가슴을 여미고 아기를 꼭 안은 채 동굴을 빠져나와 숲길을 걸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도주로가 막혀 산으로 숨어든 구마국의 잔당들은 서로 합류하지 못한 채 하나씩 소탕되었다. 동굴에 숨었던 구마부리와 십여 명의 전사들도 거칠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구마부리의 품에는 마한 연맹국의 원병이 출발한다는 서한이 들어 있었다.


강물에 투신한 어라구마의 시신은 정오 무렵에 발견되었다. 아기를 안은 팔이 풀리지 않아 인양에 애를 먹었다. 잔당을 완전히 토벌하는 데는 수일이 더 걸릴 듯했다.


도진은 가만히 일몰의 풍경을 감상했다. 소두락은 도진이 자신의 보고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장계는 말씀하신대로 올리겠습니다.”


여태 반응하지 않던 도진이 문득 깨어난 사람처럼 물었다.


“표기는 어떻게 하였느냐?”

“구마나리(루)는 검진劒津으로, 검가람은 검강劒江으로 표기했습니다. 모두 칼 검자를 썼습니다.”


도진이 다시 말 없이 강물을 바라봤다. 부드럽게 흐르는 강물 위에 노을이 내려앉아 붉은 비단 같았다.


“비단 금錦자를 쓰거라.”


소두락이 반문하자 도진이 고개를 돌렸다.


“앞엣것은 곰 웅熊자를 쓰도록 해라. 웅진熊津과 금강錦江이다.”


그 순간 소두락은 도진의 눈에서 한 여인을 읽었다. 감출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목숨을 걸었던 자신이 아니라 왜 그녀인지 의아했고 차곡차곡 쌓아올렸던 행복한 시간들이 배신당한 것에 절망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도진이 앞으로 다가오는 대신 뒤로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그가 처한 현실이 똑바로 보였다. 저 눈동자 속에서 그녀를 지울 수 없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뒤늦게 도진이 그를 위로하러 다가왔다.


팔을 벌려 소두락의 가는 몸을 안았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도진의 입술 새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이 선 발밑이 강물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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