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기억.3

by 이대연

축하연에서 돌아온 구마시루는 부뚜막 앞에 쪼그려 앉아 공연히 부지깽이를 휘저었다. 고민이 깊을 때면 으레 하는 습관이었다. 규칙도 형식도 없이 일렁이는 무정형의 불꽃을 보노라면 언제나 살길이 열리곤 했다. 구마시루가 장작 하나를 뒤집자 불꽃이 흥청거렸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같았다. 구마시루는 혀를 찼다. 그가 얻은 정보로는 비류의 죽음을 앞두고 미추홀과 위례홀 사이에 병합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가 섬기는 구마부리야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었다. 마한연맹이 지원군 파병에 미온적인 마당에 한가롭게 잔치라니, 딱한 노릇이었다.


따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흥청거릴 일도 아니었다. 전쟁을 기세로만 할 수는 없었다. 무모함과 용맹함을 혼동하는 순간 패배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장작 하나를 넣자 불꽃이 옮아 붙으며 불길이 커졌다. 타지 않고 남아있던 장작의 끝부분과 주변의 잔솔가지들이 불길에 휩쓸렸다. 구마시루의 마음이 동요했다. 십제라는 불길을 어찌 피할 것인가….


“우리에게 검전사가 있으니 그깟 십제군이 대수겠소!”


문득 누군가의 외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축하연의 참석자들이 굽다리접시를 깨는 소란 중에 들려온 것이라 누구의 음성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순간 미세하게 떨린 도진의 표정은 놓치지 않았다. 그건 느닷없이 사람들 앞에 불려나온 이의 겸연쩍음 같은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간자로 활동하며 살아남은 이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이었다. 방금 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마치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 같은…. 장작을 휘젓던 부지깽이가 문득 멈췄다. 깊은 어둠에 구멍이 뚫린 듯 구마시루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


조각난 기억은 잘 붙지 않았다. 설혹 붙는다 해도 앞뒤 없이 심중에 맺힌 상에 불과했다. 단편적이어서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질머리가 일었다. 신지 솔의 사랑도 득녀의 기쁨도 어쩐지 신통치 않았다. 전투가 필요했다. 피는 피로 씻고 혼돈은 혼돈으로 덮어야 했다.


비릿한 피내음이 이 혼돈에 구멍을 뚫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십제와 구마국 모두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대치할 뿐, 수개월 간 교전이 없었다. 몸에 살이 올랐다. 풍요 중에 마음이 병들고 안락함 중에 몸이 비둔해졌다. 도진은 칼을 들고 연무장으로 갔다. 보법을 바꿔가며 가상의 적과 싸웠다.


잰걸음으로 접근했다가 물러서고, 흘리는 걸음으로 옆으로 빠져 의표를 찌르고 큰 걸음으로 대담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려 베었다. 그러나 가상의 적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다만 칼에 찢긴 허공을 지나 멀리 붉은 백일홍이 보일 뿐이었다. 가을이었고, 풍년이었다.


전쟁 중에도 새 생명이 태어나고 곡식이 익고 풍요의 노래가 들려왔다. 오직 한 사람 도진 자신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지내는 듯했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으로 인한 혼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서 종양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다시 좀 더 빠르고 좀 더 강한 가상의 적을 상상하려 할 때 시종이 다가왔다. 구마시루라는 자가 은밀히 뵙기를 청한다고 전했다. 도진도 본 적이 있는 자였다. 구마부리가 호의로 소개한 자였으나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이고 영민함이 과했다. 도진이 꺼리는 듯하자 구마부리가 타이르듯이 말했었다.


“베일까봐 두려워 칼을 멀리하는 전사는 없습니다. 칼은 본래 그런 물건입니다. 그래서 무기가 될 수 있는 법이지요. 적당한 거리에 두고 쓰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뒤로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밀담을 청하다니 모를 일이었다.


구마시루는 공손히 조아려 도진을 맞았다.


“기억나십니까?”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진은 눈을 가늘게 뜰 뿐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이 지워졌다 해서 행적마저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기억이 사라졌다 해서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도진의 응대를 기대하지 않은 듯 구마시루는 짧게 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유념하십시오. 장군, 아니 니리므의 살길이 기억 속에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무례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도진의 입술새로 낮게 신음이 흘렀다. 마지막 말이 묵직하게 마음에 걸렸다.


겨울 초입에 십제가 정벌군에 새로운 구드레를 임명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변의 소부락 하나가 사라졌다. 집과 곳간이 불타고 사내들 중 살아남은 이가 없었다. 아녀자들은 강 너머로 끌려갔다. 구드레의 이름이 겸사익이었다.


위례홀에서 내려오려는 자가 없어 진영 내에서 영전시켰다고 했다. 도진은 몸이 떨렸다. 겸사익이란 자를 살려둘 수 없었다. 신지 솔을 비롯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날 밤 다시 강을 건넜다. 지난번 도강과는 사뭇 달랐다. 똑같이 춥고 똑같이 위험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종류의 절박감이 그를 달뜨게 했다.


이번에는 몸이 날랜 전사 몇을 동반했다. 갈대로 만든 대롱을 입에 문 채 얼음 같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며 도진은 생각했다. 이것은 백성들의 피해에 대한 공분인가, 겸사익이라는 자에 대한 까닭 모를 사감인가? 아니면 단지 피를 보기 위해서인가, 흐릿한 기억의 미궁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가? 모래톱에 발이 닿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구마국 전사들도 뒤따라 땅을 딛고 일어섰다. 물에 잠겨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짐승처럼 푸르게 빛났다.


초병 몇이 죽고 막사에 불이 올랐다. 대기가 마르고 바람이 거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군량을 쟁여둔 곳간에도 쉽게 옮아붙었다. 불길 때문에 군영이 환했다. 병사들이 허둥대며 진화에 나섰다. 그들의 발에 걸려 삼족기가 넘어졌다.


구마국의 전사들이 어둠을 골라 디디며 일렁이는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건너뛰었다. 그러나 전임자가 죽어나간 자리에 올라 수일 전에 적을 도발한 구드레가 무방비일 리 없었다. 그는 군량을 지킬 정도로 현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위험을 방관할 만치 어리석지도 않았다.


막사 안에는 십 수 명의 호위가 겸사익을 지켰다. 그 중 하나는 장수치고는 지나치게 태가 곱고 호리호리했다.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고 친근한 얼굴이었다. 겸사익이 웃었다. 화마가 번지는 군영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웃음소리가 또 귀에 익었다. 도진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허공에 던져진 굽다리접시와 조롱하듯 웃어젖히는 얼굴과…. 무장 하나가 달려들었다. 구마국 전사가 두 합 만에 그를 베었다. …가만히 자신의 팔을 잡는 손길과 갸름한 얼굴선과…. 다시 몇이 달려들었지만 그들도 구마국 전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바닥에 내리꽂혀 산산이 부서지는 굽다리접시….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지국에 당도하기 전에 반드시 저놈을 죽이리라.”


겸사익의 호위 하나가 고둥을 불었다. 도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호를 듣고 달려올 병사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마국 전사들이 용맹하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수적 열세였다.


“겸사익만 베고 갈 것이다. 모두 물러서라.”


겁먹은 호위들이 머뭇거렸다. 한둘이 뛰쳐나오려는 것을 몸이 가는 장수가 팔을 들어 막았다. 도진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소두락. 아는 체 하지 않았다. 도진이 전사들을 뒤로 물렸다. 겸사익이 분에 못 이겨 칼을 뽑았다. 비열하고 무능한 장수라 해서 검술까지 하찮지는 않았다.


발검은 신속하고 공격은 날카로웠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칼이 울었다. 피를 갈구하는 소리였다. 쇠가 쇠를 휘감고 살기가 살기를 덮었다. 칼이 움직일 때마다 불의 혀처럼 일렁였다. 발을 헛디딘 겸사익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구마국 전사에게로 쓰러졌다.


전사가 칼을 뽑는 대신 비웃으며 밀쳐냈다. 겸사익이 광분해 도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도진이 칼을 흘려 받으며 몸을 옆으로 뺐다. 칼이 미끄러지며 칼끝이 순식간에 겸사익의 목을 파고들었다. 검신의 혈조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목협도진이라는 네 자가 도진의 머릿속에 또렷이 떠올랐다.


막사 밖에는 구드레를 구하러 온 병사들이 없었다. 신임 없는 구드레보다는 화마로부터 군량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 원병이 없는 것을 확인한 도진이 발걸음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곧 짧게 칼 부딪는 소리가 난 뒤 몇 명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도진이 다시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올 때처럼 전사들과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끌려간 아녀자 몇을 구한 전사들이 어둠 속에서 합류했다.



*


“나는 내 기억 속에서 살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죽을 자리도 보지 못했다. 너는 내 기억에서 무엇을 본 것이냐?”

“기억나신 모양입니다.”

“묻지 않느냐?”

“장군의 기억이야 장군의 것이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구마시루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다만, 니리므의 생사의 길과 구드레의 생사의 길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추홀과 위례홀이 합병될 것 같습니다. 국호를 백제로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강 건너 오합지졸을 물리친다 해서 십제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얘깁죠.”


구마시루는 십제군 우두머리를 죽이고 끌려간 아녀자들을 구해온 검전사의 활약을 신나게 떠들어대는 백성들을 떠올렸다. 민심은 부리나 모랑이 아니라, 신지 솔이 아니라 도진에게로 기울었다. 신지 솔은 어떨지 몰라도 부리와 모랑은 다를 것이다. 본래 욕망과 질투는 한 몸이다.


한쪽이 자극되면 다른 한쪽이 고개를 드는 법이다. 그들은 도진을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제가 아니라도 이미 살아남기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러나 구마시루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모두가 구마시루를 자신들의 칼이라 여겼지만 그들 또한 구마시루가 올라탄 말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이번에는 도진이 그의 말이었다. 도진이라는 말을 타고 이 위험에서 벗어나리라.


“나는 배신한 장수를 살려주는 왕을 보지 못했다.”


“지금 위례홀에는 음탕한 여왕의 주술에 걸린 젊은 장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소문을 좋아합죠. 모두들 안타까워합니다. 젊은 장수의 부모는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만….”


구마부리가 낸 소문이었다. 말 위에 올라타려면 최소한 말이 달릴 길은 닦아놓아야 했다. 그는 도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 젊은 장수가 주술을 풀고 돌아와 전공을 세운다면 영웅이 되지 말라는 법이 또 있겠습니까?”

“재주가 좋구나.”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만, 허락해주신다면 구드레를 위해 쓰겠습니다.”


도진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니리므로서의 삶과 구드레로서의 삶은 병존할 수 없었다. 오로지 택일만이 가능했으나 도진은 고를 수 없었다. 니리므에게는 아내와 딸이, 구드레에게는 부모와 그의 군대가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신지 솔은 자주 아이를 데리고 도진을 찾았으나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아내와 아이를 반기지 않았다. 까닭 모르게 겉도는 그가 불안하고 서운했다. 그 빈 자리를 모랑이 파고들었다.


“급박한 상황에 호위를 다 죽인 것도 이상하지만 장수 하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하니 더욱 수상합니다. 그 장수가 십제 군영에 있을 때 부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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