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기억.2

by 이대연

의식을 회복한지 사흘째 되는 날 칼자루를 쥔 이가 그를 찾았다. 여인이었다. 눈매가 온화하고 콧볼이 도톰했다. 기품 있고 아름다웠으나 의복과 말씨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낯설었다.


“기억하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도진은 답하지 못했다. 여인은 도진의 상태를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괜찮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 위대한 전사는 스스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기억은 나의 몫이니, 너는 다만 싸워라. 내가 기억하겠다.”


그러곤 돌아서 나가버렸다. 영문 모를 방문이었다. 도진은 한동안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탄복했고 다정함에 감화하였으며 무심함에 전율했다. 칼자루를 쥔 이의 위엄이었다. 그녀의 칼이었다면 기억나지 않는 지난 삶도 나쁘지 않았겠구나 싶었다. 앞으로의 삶 또한 그럴 것이었다.


외상은 심하지 않았다. 며칠 가료하자 회복되었다. 한동안 뜸했던 십제의 유격병이 포착되었을 때,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솔선해서 말에 올랐다. 투구도 갑옷도 챙기지 않았다.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말의 투레질이 듣기 좋았다. 말발굽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얼굴이 시원하고 고삐를 잡은 팔 근육이 기분 좋게 긴장됐다. 십제 유격병의 수는 꽤 많았다. 유격전을 위한 별동대의 규모를 이처럼 크게 운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피아가 한데 엉켜 말을 탄 채 싸우기가 어려웠다. 뛰어내려 달려나갓다. 한 놈을 베었다. 얼굴에 피가 튀었다. 그리고 살을 베는 칼맛. 칼날에 묻은 피를 털며 다시 휘둘렀다. 칼끝이 뼈를 스치며 몸통을 꿰뚫었다.


“너는 다만 싸워라. 내가 기억하겠다.”


말하는 신지 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칼을 빼내며 다시 피를 털었다. 그를 괴롭혔던 혼돈이 가라앉고 의문이 말끔히 지워졌다. 정신이 해갈되고 몸이 해금되었다. 칼이 조롱에서 풀려난 새처럼 허공에서 춤췄다. 훼를 칠 때마다 피가 튀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도진이 구마국의 전사가 되어 나타낫다는 생존자의 보고로 십제군 진영이 충격과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구마국에서도 소동이 일어났다.


“기세가 호랑이와 같고 용맹함이 곰과 같았습니다. 아군조차 마음이 두려워 동요했습니다.”


궁궐이 술렁였고 민심이 술렁였다. 전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목지국에서 돌아오던 구마시루는 백성들의 표정을 보고 의아했다. 웃고 있었다.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들떠 있었다. 잔치라도 벌일 모양새였다. 행인을 잡아 물으니 미치광이 전사 때문이라고 했다. 진짜 미친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잘 싸운다고 해서 그리들 부른다고 했다. 대답을 듣고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구마부리를 찾았다. 구마부리는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빠짐없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도진이 기억을 잃은 사실은 생략했다. 투항했다고 했다. 자신의 사람이기는 해도 이곳저곳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루는 간자의 우두머리를 완전히 믿을만치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래 목지국의 사정은 어떤가?”


구마부리의 말을 들으며 한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구마시루가 그의 질문에 빙긋 웃었다.


“안 좋습죠.”



*


마한은 북쪽으로는 십제, 남쪽으로는 변한, 동쪽으로는 진한과 접하고 있었다. 진한과 변한이 각기 사로국과 구야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고 변경국들이 특별히 방비에 힘을 쓰고 있던 차에 십제가 침공하니 군사를 지원하기가 어려웠다. 목지국의 진왕은 마한의 수령이기는 해도 연맹소국의 선출에 의한 것이라 병력을 동원할 강제력이 없었다. 구마국이 뚫리면 바로 목지국이었다. 애가 타기는 진왕도 마찬가지였으나 도리가 없었다. 그는 변방의 수호와 상관 없는 해안의 연맹국들에 통문을 돌려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를 요청했으나 쉽지 않았다.


부리에게 설명을 들은 신지 솔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지원병이 없거나 늦는다는 얘기였다. 도진의 활약 이후 십제군은 더 이상 유격병을 보내지 않았다. 강 너머에 있으니 백성들의 생업에도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앞의 적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적어도 목지국이 연맹의 지원군을 모아 보낼 때까지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할 방도가 필요했다.


“적장의 목을 베시지요.”

“누구를 말하는 것이요?”


신지 솔은 구마모랑의 말에 되물었으나 곧 후회했다.


“물론 배응로입니다.”


십제는 새로운 지휘관으로 배응로라는 무장을 보내 구드레로 삼았다. 낙랑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자라고는 하나 실상 독선적이고 무능한 자였다.


모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물으시는 걸 보니 신지께서는 적장이 아직 두 명이라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모랑은 신지 솔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적장을 보내 적장의 목을 베시지요. 그러면 알 수 있겠지요. 적장인지 구마의 전사인지.”


도진을 적진 한 가운데로 보내자는 얘기였다. 가혹한 처사였다. 백성들이 도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를 사지로 내몰면 민심이 흉흉해질 게 분명했다. 구마부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은근히 모랑의 제안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신지 솔은 내막을 알 수 없는 이들의 꿍꿍이에 놀아나지 않으려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곁에 두려면 믿음이 필요하지요. 배응로의 수급을 갖고 온다면 그의 심중에 진심어린 충정을 확인하고 십제군의 움직임도 늦출 수 있겠지요. 실패하거나 돌아오지 못한다면 믿지 못할 자이거나 무능한 자이니 곁에 두는 위험을 덜 수도 있겠고요.”


모랑이 맞장구를 치려는 순간 가만히 있던 구마부리가 입을 열었다.


“민심이 문제입니다. 백성들은 그를 미치광이 전사라고 부릅니다. 미친 듯이 잘 싸워서지요. 기세가 곰과 같다고 해서 검전사라고도 부릅니다.덕분에 이제 막 민심이 수습되기 시작했습니다. 강 건너 적장의 수급을 가져오라는 건 죽으러 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용납하겠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신지 솔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진작에 상을 걸려고 합니다. 검전사라고 했나요? 그가 돌아오면 누구에게나 청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어요.”


모랑과 부리 두 사람의 눈이 모두 휘둥그래졌다. 신지 솔의 말은 새 낭군을 들이겠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구마국은 모계로 혈통이 전해지는 만큼 일처다부제의 관습이 남아 있었다. 신지 솔도 두 명의 낭군을 두고 있었다. 니리므 구마모랑과 니리므 구마부리가 그들이었다.


니리므란 신지의 낭군을 이르는 말이었다. 모랑은 병권을, 부리는 행정권을 쥐고 있었다. 신지에게는 혼인도 정치요 통치의 일환이었다. 새 낭군을 들이면 모랑과 부리의 권력이 분산되었다. 더구나 장수이며 민심을 얻고 있는 도진이라면 두 말할 나위 없었다. 모랑과 부리 둘 모두를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었따. 아직 어린데도 신지 솔의 셈법이 영악했다. 모랑과 부리는 기가 막혀 말문을 닫았다.


겨울 강물이 살을 에는 듯했다. 도진은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넜다. 작은 뗏목 하나가 마중나와 그를 건졌다.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고 호랑이 가죽을 덮어써도 몸이 떨렸다. 도진은 허리춤의 보퉁이를 확인했다. 애초에 적장의 수급을 받아오라는 명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득도 명분도 없이 죽으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상급이 너무 컸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거칠게 요동하는 심장의 박동이 명분이었고 성공의 보상이 소득이었다. 도진은 무모한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 차출된 병사들은 강 이편에 남겼다. 신호를 보내면 뗏목을 보내도록 했다. 잠입을 위해서는 단신이 나았다. 널빤지와 속을 비운 갈대를 이용해 도강한 후 적진영에 숨어들었을 때 도진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병사들이 밥을 지어먹고 씻어서 막사 앞에 내놓은 삼족기가 낯설지 않았다. 막사들 간의 샛길도 익숙했고 구드래의 천막도 기이하리만치 쉽게 찾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하고 불길한 의혹이 엄습했다. 그러나 금세 털어내었다. 전사는 다만 싸워서 임무를 완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녀가 기억할 것이다.


유격전을 위한 별동대의 운용을 대규모로 편성하는 어리석은 지휘관 배응로는 무예 실력도 변변찮았다. 내일이면 십제군의 진영에서는 난리가 날 테지만, 십제군 병사들에게 있어서도 배응로 같은 구드래는 없는 게 나은 인물이었다. 무능한 지휘관은 아군에게나 적군에게나 쓸모 없는 존재였다.


뗏목이 모래톱에 닿자 성큼 내려 말에 올랐다. 허리춤을 만져 신지 솔에게 전해줄 소중한 기억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도진은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가벼운 구보로 그녀에게 향했다.



*


혼례는 소박했다. 전란 중에 성대한 잔치는 곤란했다. 그래도 도진이 어라구마의 세 번째 니리므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지 솔 역시 도진을 처음 본 후부터 심중에 두고 있었다. 이미 두 남편이 있다고는 해도 정략결혼이어서 그들을 마음에 품지 못했다. 오히려 어떻게든 신지 자신의 권력을 쪼개 강탈하려는 모리배들에 불과했다. 그러던 차에 도진과의 신혼은 달콤하기만 했다. 십제군이 코앞에 있다고는 하나 배응로가 살해된 이후로 전의를 상실했다. 구드레가 없는 그들은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얼마 지나 신지 솔의 회임 소식이 구마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세 남편 중 누구의 씨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때까지 불임이던 솔이 임신한 것으로 보아 도진의 씨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세 남편의 아이었다. 겸연쩍지만 모랑이나 부리도 그나마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침내 아홉 달이 지나 순산했을 때, 신지 솔은 혼례와 마찬가지로 조촐한 축하연을 원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여아였다. 후계자의 탄생이었다. 마한 연합 각지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왔다. 시끌벅쩍한 분위기가 어느새 십제를 성토하는 자리로 변했다. 누군가 빈 굽다리접시를 공중으로 던졌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받았다.


그가 다시 다른 이에게로 접시를 던졌다. 떠들썩한 폭소와 함께 접시가 몇 번을 더 돌았다. 처음에는 시녀를 놀리고자 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곧 자신들이 소망을 투사했다. 십제군이 곧 굽다리접시에 담긴 고기 꼴이 되리라는 암묵적인 호언이었다. 이윽고 호전적인 구마모랑이 벌떡 일어섰다.


굽다리접시의 고기를 쏟고 바닥에 내리쳐 박살냈다. 좌중이 한껏 들떴다. 각자 앞에 있는 접시를 집어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수십 개의 굽다리접시가 한꺼번에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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