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는.2

나비처럼 떠다니는

by 이대연

다리의 통증과 불편한 상념들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했다. 늑대는 포도주를 한잔하고 싶었다.


엎어진 바구니 주변은 부서진 비스킷들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포도주병은 보이지 않았다. 깨진 병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깨어지지 않았다면 어딘가로 굴러가 처박혀 있을 것이다.


늑대는 손으로 더듬어 바닥을 훑었다.


“무얼 찾고 있니, 꼬마야?”


기억의 촉수들을 비집고 튀어나온 한 마디에 늑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제대로 다잡지 않으면 쓸데없는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올 것 같아 겁이 났다.


“무서워할 필요 없단다.”


기억의 촉수는 한 번 문 먹이를 놓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집요했다. 늑대는 고통스럽게 저항했다.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고삐가 풀린 기억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무얼 찾고 있니, 꼬마야?”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늑대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소녀는 놀랐는지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무서워할 필요 없단다.”


늑대는 소녀가 겁먹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바구니에서 포도주병이 떨어졌나 봐요. 할머니에게 갖다 드려야 하는데….”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내가 찾아주마.”


포도주병은 모로 엎어진 식탁 뒤편에 있었다. 그러니 찾을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충격이 심했을 텐데도 병은 깨지지 않았다.


코르크스크루는 선반 위에서 쉽게 찾았다. 늑대는 나선의 철심을 깊이 박아 넣고 힘을 주었다.


코르크 마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빠지는 대신 맥없이 부러졌다. 코르크스크루를 잘못 박았거나 원래부터 질이 나쁜 코르크였을 것이다.


일부는 떨어져 나가고 일부는 남아 병 주둥이를 막았다. 늑대는 남은 부분에 코르크스크루를 박아 넣었다.

이번에는 코르크가 부서졌다. 병 안으로 떨어져 포도주에 떠다니는 부유물이 되었다.


사소한 불운일 뿐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늑대는 거칠게 포도주를 들이켰다. 특유의 텁텁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몸이 나른했다. 신경전달물질들이 코르크 부스러기처럼 두개골 속을 떠다니는 듯했다.

친숙해진 어둠이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취기 때문일까,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듯하였다.


몸은 그대로 있는데 체액만 밑으로 스미는 듯도 하였다.


사라질 수 있을까? 늑대는 생각했다.


바닥으로 꺼지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늑대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돌연한 충동에 당황했다.


소멸. 문밖에서 오두막 안을 바라보며, 그 어둠이 머금고 있을 것만 같은 소멸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소멸의 충동이 늑대의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피어나고 있었다.


침대에 팔을 걸치던 늑대는 낯선 감촉에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의 수면 모자가 떨어질 듯이 침대 모서리에 걸쳐 있었다.


늑대는 모자를 집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귀 때문에 모자의 윤곽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어차피 서두를 건 없었다. 날이 밝으면 원하지 않아도 추격자들의 총구가 그를 따라잡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들의 적의로부터 울려 퍼진 총성이 늑대의 몸을 찢는다고 해도, 그것이… 소멸일 수 있을까….


그때, 왜 빨간색을 구별해야 하냐고 묻는 늑대를 할머니는 한참이나 바라봤다.


“네가 죽을까 봐 그런단다.”


할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늑대는 문득 의심스러워졌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왜 소녀를 해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일까?


사탕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이 사탕은 먹지 마라’고 경고한다면 무슨 의미일까? 늑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난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할머니는 아교로 접착한 신발과 밑창 사이의 경계에 입바람을 불다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구나. 내가 실수했다.”


그러나 늑대는 입바람을 부는 무심함과 겸연쩍은 웃음 사이에서 미묘한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인지, 실수로 위장하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늑대의 마음에 불길한 혐의가 일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 말은 단지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의심하지 마라.”


할머니의 단호한 음성이 생각을 가로막았다. 의혹의 미로를 헤매던 상념이 다시 기억 속으로 끌려들어 왔다.

할머니가 따뜻한 벽난로 가장자리에 신발을 기대놓을 때였다.


어떻게 빨간 망토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냥 너 자신을 믿으면 되는 거란다. 네 마음이 보는 색이 진실이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늑대는 한눈에 빨간 망토를 알아볼 수 있었다.


흑백의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무채색의 세계에 나비처럼 떠다니는 단 하나의 유채색.


늑대는 동공이 불타는 듯한 느낌에 소스라쳤다. 그것이 빨강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늑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에도 빨간색은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시각세포가 까맣게 타버릴까 봐 두려웠지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홍채가 열리고 각막이 투명해졌다. 망막은 온전히 색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색의 신성 혹은 마성 앞에 늑대는 굴복했다.


그리고 색은 늑대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격정을 끌어냈다.


늑대는 멀찍이 떨어져 소녀를, 아니 무채색의 세계에 날아다니는 빨간 나비를 지켜보았다.


걸으면 걷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소녀의 뒤를 쫓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무성하게 자란 풀잎과 풀잎 사이로 보이는 빨간색을 감상했다.


소녀의 모습이 나무나 풀잎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면 조바심을 쳤다.


유혹적인 색의 매혹에 이끌려 늑대는 걷고 멈추고 때로는 뛰었다.


그렇게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야 늑대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구별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구별할 수 있을 게다.


잠시 멎었던 통증이 다시 일었다. 간헐적으로 이는 통증은 지속적인 통증처럼 몸을 지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고통 자체를 환기하고 의식하게 했다. 목동의 지팡이처럼 상념들이 길을 벗어날 때마다 온전히 고통으로 집중시켰다.


늑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상처를 핥았다. 사라지면… 고통도 없어지겠지…. 늑대는 생각했다.


고통이 존재를 증명해줄 유일한 근거가 되어 주리라는 폐기된 믿음이 어쩌면 아직 유효한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살아있다는 거니까.


그러나 추적자들을 피해 살아난다고 해도, 이런 상처를 입고서 예전처럼 뛸 수 있을까?


늑대의 기억이 숲과 들판을 향해 내달렸다. 털끝에 미끄러지는 바람의 촉감이 느껴지고 맹렬히 땅을 박차는 다리의 근육이 살아나는 듯하였다.


늑대는 도리질을 쳤다. 달릴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삶이란 그대로 고통과 다를 바 없었다.


늑대는 코웃음 쳤다. 삶과 고통의 험악한 공생이라니….


소녀를 봤을 때도, 아니 소녀가 걸친 망토의 빨간색을 봤을 때도 그랬다.


독버섯에 취한 듯한 몽롱함과 달뜬 열기 속에서 솟아난 강한 열망은 희열이니 환희니 하는 종류의 감정들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다.


남은 틈을 온전히 채운 것은 고통이었다. 쾌와 불쾌가 동일한 무게로 늑대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다.


늑대는 색을 보고 싶었고 취하고 싶었고 종국에는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늑대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으므로 달리고 또 달렸다. 드넓은 들판을 달리노라면 거대한 태양이 떴다 지고 바람이 불고 달이 떴다.


마침내 절벽에 이르러 더 달릴 수가 없으면 늑대는 울었다. 목을 길게 빼고 흑백의 달을 향해 서럽게 울음을 울었다.


“네 울음소리가 멋지구나.”


아니다. 할머니가 한 말이 아니다. 늑대는 기억을 바로잡았다.


“아저씨 울음소리가 멋져요.”


소녀는 말했었다. 소녀는 며칠에 한 번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를 찾아왔다. 늑대는 언제나 손꼽아 그날만을 고대했다.


소녀는 정오가 가까이 돼서야 왔지만, 늑대는 아침부터 숲 언저리로 달려가 소녀를 기다렸다.


그러면 멀리서 빨간색이 다가왔다.


숲을 가로질러 오두막까지 가는 소녀를 멀찍이 떨어져 지켜만 보던 늑대는 말을 걸었고, 잃어버린 포도주를 찾아주었고, 친해졌다.


소녀는 꽃을 좋아했다. 늑대는 꽃들이 많이 피어있는 곳을 미리 봐두었다가 소녀에게 일러주었다.


소녀가 숲을 지나 오두막에 도착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늑대는 그만큼 오래 빨간색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엔 가끔 숲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팔베개를 하고 누워 꽃밭에서 뛰노는 소녀를 보고 있을 때였다. 늑대는 무슨 말인가 싶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늑대의 울음은 서로를 향한 신호였다. 그러나 숲에는 다른 늑대가 없었다. 늑대는 외로웠다. 간혹 밤이면 달을 향해, 나무를 향해, 풀잎과 별을 향해 신호를 보내곤 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은 안 들려요. 들판 끝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녀가 늑대에게로 다가왔다. 빨간색이 동공에 점점 더 깊숙이 박히는 느낌에 늑대는 아찔했다.


“다시 숲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아저씨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소녀가 늑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늑대는 움찔하였다. 알 수 없는 전율이 늑대의 몸을 관통했다.

“그거 알아요? 아저씨 울음소리가 참 멋져요.”


손바닥만 한 늑대의 혀가 소녀의 볼을 핥았다. 소녀가 웃었다. 늑대는 소녀의 이마를 핥았다. 소녀는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늑대는 소녀의 얼굴과 턱과 귓불을 핥았다. 웃음소리가 차츰 커졌다. 늑대가 소녀의 목과 입술을 핥았다. 소녀는 숨넘어갈 듯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소녀의 웃음소리가 숲 속에 가득 찼다.


늑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팠다.


온종일 굶었는데도 다리의 통증과 고단함과 추적자들에 대한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미처 허기를 달랠 생각을 못 했다.


늑대는 바구니에 담겨 있던 비스킷을 떠올렸다. 소녀가 들고 오는 바구니에는 오리요리나 비스킷이 번갈아 가며 들어 있었다.


비스킷은 여기저기 흩어져 찾아 먹기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바구니에는 소녀가 꺾은 꽃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바구니가 엎어질 때 한데 뒤섞여 쏟아진 꽃과 비스킷을 구별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잘 고른다고 해도 간혹 꽃잎을 씹어야 했다.


바구니에 들어 있던 것이 비스킷이 아니라 오리였다면…. 입안에 든 꽃잎이 떫었다. 늑대는 혀를 움직여 입천장을 긁었다. 떫은맛이 가시지 않았다.


입안에서 진한 꽃향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늑대는 바닥에 흩어진 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코를 대보았다. 재채기가 날 것 같았다. 찢기고 상처가 났는데도 향기는 여전했다.


이 어둠 속으로 나를 부른 것이 꽃향기는 아니었을까?


“고맙습니다.”


포도주를 찾아준 날 소녀는 늑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숲을 지나오며 하나씩 따 모아 바구니에 담아둔 것이었다.


한 다발의 들꽃에서는 알싸하고 진한 향이 났다. 예민한 코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늑대는 재채기했다.


그 바람에 꽃잎 하나가 날아올라 부드럽게 허공에서 가라앉았다.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아저씨도 오두막에 함께 가요. 오늘은 오리요리거든요. 엄마의 오리요리는 일품이에요. 게다가 할머니랑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걸요.”


그러나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할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다. 늑대는 소녀를 오두막에 바래다주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 할머니와 소녀를 지켜보았다.


오두막 앞에 테이블에 흰 식탁보가 깔렸고 반짝이는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잠시 후 나온 오리고기에서는 김이 났다.


할머니는 코르크스크루를 돌려 포도주를 땄고 소녀는 요리를 접시에 덜었다. 흙빛의 포도주가 잔에 담겼고 연회색 오리고기가 조각났다.


그때도 늑대는 강한 허기를 느꼈었다. 빨간색 주변을 떠도는 흰색과 검은색들.


소녀는 칼과 포크를 이용해 자른 고기 조각을 입속에 넣어 우물거렸고 할머니는 투명한 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오리는 하얗게 드러난 치아에 짓이겨지고 조각난 채 타액과 범벅이 돼 마침내 소녀의 몸속으로 스몄을 것이다.


할머니의 입속으로 흘러드는 검은 액체는 오리의 피처럼 느껴졌다. 소녀가 칼을 움직일 때마다 햇살에 반짝였다. 늑대의 입에 침이 고였다.


억센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무심코 몸을 움직이다가 엎어진 탁자 모서리에 상처를 찧고 말았다.

다리를 절단하는 듯한 고통에 사지가 떨렸다. 절제되지 않고 침이 흘러내렸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서 송곳니가 희게 빛났다.


“네가 어쩌자고 내게 이빨을 드러내는 게냐!”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초점을 잃고 멍하니 어둠을 응시하던 늑대의 눈이 반짝였다. 분노와 절망이 일순 그 눈빛을 타고 흘렀다.


꽃향기와 달큼한 포도주 향에 섞여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오두막 속의 어둠이 몸을 짓누르는 듯도 했다.


늑대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어차피 어둠과 고통뿐이라면….

늑대는 몸을 낮춰 침대 밑으로 기어들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내밀한 고통의 기억 속으로 침윤되리라.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은 어둠의 가장 끝처럼 느껴졌다.


늑대는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들판의 끝, 그 아득한 절벽 위에서 울부짖듯이, 희미해지는 정신을 이끌어 참담한 기억 속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늑대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