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나비가 종종걸음치며
할머니가 작정하고 화를 낸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뜨개질을 멈추고 따뜻한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컵을 감싼 두 손에 온기가 전해졌고, 포도주 향과 계피 향과 기화하는 알콜의 알싸함이 코를 자극했다.
그러나 재채기를 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흐트러진 숄을 바로 잡은 후 의자에 놓아둔 대나무 바늘과 털실을 집어 들었다.
“어디가 아픈 게냐?”
“눈이…, 아니 머리가….”
머뭇거리던 늑대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뜨다만 곳을 찾아 익숙하게 움직이던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안경 너머의 시선이 뭔가를 직감한 듯 늑대를 응시했다.
“그 아이를 보았구나.”
늑대는 할머니를 외면했다.
“지금 어디 있니?”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닌데.”
견딜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 애를 해쳤느냐?”
늑대는 말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고, 빨강이 나를 먹었다고. 내가 아니라 그 색이, 웃음소리가, 꽃잎이 나를 먹어치웠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단지 색에 취하고 색과 하나가 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 색이 나를 집어삼킬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늑대는 기억을 더듬었다.
소녀는 온통 빨강이었다. 웃음소리와 꽃향기가 빨갛게 달뜨고, 머리와 얼굴에서 빨강이 번졌다. 몸이 빨갛게 물들었고 팔과 다리에서도 빨강이 흘러나왔다.
늑대는 그 색을 뒤집어쓰고 색에 전염되었다. 스스로 빨강이 되어 숲속을 뛰어다녔다. 무채색의 늑대가 아니라, 빨강이 되어 발광發光하며 숲을 채색했다.
“그런 게로구나!”
할머니의 호통에 늑대는 엄니를 드러냈다. 저도 모르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고 눈이 충혈됐다.
“네가 감히 어디서 이빨을 드러내는 게냐!”
그 순간이었다. 기억으로부터 날아온 빨강이 한 마리 나비처럼 코끝에 내려앉았다.
코끝이 간지러워 재채기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진한 향이 났다. 갈증과 그리움, 열망과 간절함이 응축된 진한 향이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늑대는 매캐한 냄새에 눈을 떴다. 무언가 타는 듯했다. 늑대는 침대 밑에서 나와 냄새의 근원을 찾았다.
밖에서부터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도 느껴졌다. 불이 난 것이 분명했다.
늑대는 직감적으로 추적자들이 불을 놓았음을 알았다. 벌써 날이 밝은 걸까?
늑대는 들창을 살짝 열어보았다. 밝은 빛이 날카로운 면도칼처럼 늑대의 눈을 스치고 지났다.
늑대는 얼른 들창을 내렸다. 낭패스러웠다. 연기는 점점 더 실내를 채워갔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때 왜 노릇노릇하게 익은 오리를 떠올렸는지 늑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털이 까맣게 그을린 볼품없는 모습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문 앞에 이르러 늑대는 다시 주저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냥꾼들의 총부리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늑대는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엎어진 식탁과 침대와 바구니와 포도주병….
늑대는 목을 빼고 길게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하였다.
늑대는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이 소리를 냈다. 밝은 빛이 망막 위에 투명하게 내려앉았다.
늑대는 남아있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떨어진 신발 밑창이 덜렁거려 신경에 거슬렸고, 환한 빛줄기 너머로 총신이 반짝였다.
늑대는 힘껏 뛰어올랐다.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목덜미가 화끈했다. 늑대의 몸이 공중에서 활처럼 휘었다.
그리고 늑대는 허공에서 피어나는 빨간 꽃을 보았다.
늑대는 어둠에 영사된 꿈의 잔상을 응시했다. 자욱한 연기와 적의로 반짝이는 총구와 허공에 피어난 빨간 꽃….
늑대는 죽음의 공포와 색의 환희로 가득한 꿈의 미장센 위를 부유했다 의식이 두서없이 배열된 프레임을 따라 느리게 점멸했다.
꿈의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통증이 다시 가파르게 밀려왔다. 늑대는 짧게 신음을 토했다.
총알이 마치 싹을 틔우는 씨앗처럼 살 속에서 꿈틀대는 듯했다. 상처 위로 돋아난 떡잎에서는 빨간 꽃이 필지도 모른다.
늑대의 시선이 빠르게 현실로 소환되었다.
빨간 꽃. 꿈의 시작은 모른다 해도 끝은 알 수 있었다. 그 끝은 꿈이라기보다는 언제든 실현 가능한, 잠재된 현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늑대가 직시해야 할 현실은 다리의 상처와 오두막의 어둠과 곧 뒤쫓아 올 추격자들이었다.
마음이 불길하고 조급했다. 꿈에 짓눌린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늑대는 바닥에 손을 짚어 힘겹게 침대 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반쯤 몸을 뺐을 때 조심스럽게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의 몸이 반사적으로 경직됐다. 숨을 죽인 채 주의를 집중했다. 뾰족한 귀가 수 면모자 안쪽에서 쫑긋했다.
금세 지붕 전체에서 요란한 소리가 낫다. 늑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빗소리였다.
문을 열자 낡은 경첩의 마찰음 뒤로 습기를 머금은 서늘한 대기가 밀려들어 왔다. 한기에 몸이 살짝 긴장됐다.
늑대는 벽난로를 돌아봤다. 공연한 욕심이었다. 늑대는 바닥에 떨어진 숄을 주워 어깨에 둘렀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빗소리가 들렸다.
문을 경계로 어둠은 이편과 저편의 구분이 뚜렷했다. 깊이도 질감도 다른, 이질적인 어둠이었다. 날이 밝으면 사라질 어둠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빗줄기가 추적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더디게 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전에 다리에 박힌 총알을 뽑고 사냥꾼의 총구가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
늑대는 절룩거리며 돌아섰다. 문은 열어두었다. 사냥꾼이 생각보다 일찍 온다 해도 숨어서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늑대는 코르크스크루가 있던 선반에서 아교를 꺼내 신발 밑창을 붙였다. 도대체 언제 다시 떨어진 걸까?
며칠간의 행적을 더듬어보았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 날아온 빨간 나비가 코끝에 앉았을 때였는지도 모르고, 추격자들의 총알이 다리에 박히는 바람에 넘어져 뒹굴었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늑대는 불기 없는 벽난로 가장자리에 신발을 기대놓았다. 바로 옆에 안경이 떨어져 있었다. 알이 모두 깨지고 한쪽 다리가 조금 휘어 있었다.
늑대는 물끄러미 안경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늑대를 응시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떠올랐다.
때로는 자상했고, 때로는 의심스러웠고, 때로는 무서웠다. 늑대는 두툼한 발로 밟아버리려다 그만두었다.
할머니에게 안경 너머는 얼마만큼 선명한 세상이었던 걸까? 숲과 하늘이, 꽃과 나비가, 선과 면과 색이, 얼마만큼의 선명함으로 존재했던 걸까?
늑대는 구부러진 안경다리를 조심스럽게 바로잡은 후 귀에 걸쳤다. 수면 모자를 잊은 탓에 한 번 헛손질했지만, 곧 깨닫고 안경다리를 모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둥근 금속 테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 사물이 더 명확히 보이는 듯했다. 고개를 돌리자 두 개의 작은 원 속으로 포도주병이 들어왔다.
잠시 망설이던 늑대는 결행의 의식처럼 얼마 남지 않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간혹 코르크 부스러기가 목에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주둥이에 맺힌 마지막 방울까지 혀로 핥은 늑대는 거침없이 탁자 모서리에 병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파편이 튀었다.
유리 조각이 살을 찢었다. 손잡이가 될 만한 부위에 천을 감아 힘을 주기는 용이했다.
살이 찢기는 아픔보다 터지는 비명을 참는 게 훨씬 고통스러웠다. 앙다문 잇새로 침이 흘렀다.
늑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물질이 살을 가르고 파고드는 느낌이 선명했다. 고통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요구했다.
이윽고 이물질이 또 다른 이물질과 닿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빨간 꽃을 피워 올릴 금속성의 씨앗이었다.
그리 깊이 박히지는 않았다. 서툰 솜씨였다. 노련한 사냥꾼이었다면 좀 더 가까이 접근해 좀 더 정확히 조준했을 것이다.
늑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찢긴 살이 벌어져 가늘고 날카로운 어둠을 뱉어냈다. 음험한 입술처럼 보였다.
어둠이 단어가 되고 고통이 문장이 되어 금방이라도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저씨 울음소리가 참 멋져요. 늑대는 도리질을 쳤다. 네가 어쩌자고 이빨을 드러내는 게냐! 늑대는 더욱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오리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말이 말을 덮고 소리가 소리를 덮었다. 온갖 말들이 서로 겹치고 섞여 기괴하게 들렸다.
늑대는 말을 자르듯 대나무 바늘 두 개를 입속에 꽂아 넣었다. 말소리들이 고통에 찬 신음으로 바뀌었다.
어느 입술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을 통해 미풍이 불어왔지만, 고통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늑대는 심호흡으로 간신히 숨을 고르며 젓가락처럼 쥔 두 개의 대나무 바늘을 움직였다.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세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젓가락 끝에 총알이 걸렸다.
늑대는 긴장의 끈을 다잡으며 젓가락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금속성의 씨앗을 잡아 뺐다.
늑대는 알 없는 두 개의 원을 통해 총알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수상한 물질이 총알과 엉켜 있었다. 긴 꼬리가 환부로 이어졌다. 털실이었다. 불길하다기보다는 의아하고 난처했다.
늑대는 털실을 잡아당겨 보았다. 한 뼘만큼 실이 딸려 나왔다. 살이 쓸리는 느낌이 났지만, 통각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다시 잡아당겼다. 또 한 뼘만큼 풀려나왔다. 늑대는 대나무 바늘에 실을 감았다. 감는 만큼 털실이 풀려나왔고, 풀린 만큼 대나무 바늘에 감겼다.
털실은 마치 마술사의 입에서 나오는 리본처럼 한없이 이어졌다. 음험한 입에서 토해진 말들이 물질로 응고되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늑대는 풀려나온 말들을 정성스럽게 감았다. 당기고 감는 동작이 금세 손에 익었다. 실이 풀려 빠져나갈 때마다 다리가 시원했다.
대나무 바늘에 감은 실이 제법 두툼해졌을 때야 늑대는 자신의 몸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상하게도 놀랍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정체 모를 안도감이 늑대를 안심시켰다.
수면 모자와 안경을 쓰고 숄을 걸친 채 대나무 바늘에 실을 감았다.
한쪽 다리가 사라지고 나머지 다리마저 사라질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사각진 문틀 밖에서 세상이 빠르게 밝아졌다.
흑백의 풍경에 비가 내렸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보는 듯했다. 오두막 안으로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몸이 사라지고 다음에 머리가 사라졌다. 어깨가 사라지면서 숄이 미끄러졌다. 뒤이어 안경이 떨어지고 곧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팔과 손만이 허공에 떠서 실을 감았다.
늑대는 안구도 시신경도 없이 시선만 남아 털실로 풀려나는, 아니 말로 환원되어 감기는 몸을 지켜봤다.
손목이 사라지고 막 손등이 사라지려 할 때 숲 언저리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시선은 문밖의 풍경을 유심히 살폈다.
나비였다. 빨간 나비가 숲을 빠져나와 비가 내리는 흑백의 필름 위로 종종걸음치며 날아오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감긴 실타래가 바닥에 떨어졌다. 늑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