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로 꿈을 꾸는 사람
글자로 꿈을 꾸는 사람을 안다. 이름이 수정이었다. 물 수水에 정자 정亭. 물 위에 떠 있는 정자인지 물로 이루어진 정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름이 좋았고 생김생김이 좋았다.
결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수정이 전화를 걸어 말했다.
“어젯밤은 종이에 인쇄된 글자가 아니었어. 성벽처럼 높이 쌓아 올린 글자였어. 그 위에 내가 서 있었는데 아슬아슬했어.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턱밑을 지나갔어. 무슨 글자인지 보려고 하는데 안 보이더라, 너무 커서. 그 큰 글자 위에서도 떨어질 것 같아 조바심이 났어.”
약간 흥분한 음성이었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글자가 무엇이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꿈을 꾼 당사자가 모른다는데 나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풀 수 없는 숙제를 안은 채 결혼했고 십 년 후 이혼했다. 얼마 전 확인한 SNS에는 쇼트커트에 버스 기사 제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소매를 두 단 정도 접어 올려 역동적으로 보였다. 목포 시내 어느 도로 위를 물 흐르듯이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물 수水에 정자 정亭. 그런데 그녀가 밟고 선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
원형 건물 위에 서 있는 예수상을 봤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수정의 꿈이었다.
거대한 조경석을 매끄럽게 다듬어 ‘가톨릭목포성지’라고 음각한 비석 왼쪽으로 주차장을 지나 걸어오면 축대로 깎아지른 모퉁이 끝, 목포 원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예수 성심상이 있었다.
브라질의 코르코바도나 베트남 붕타우의 예수상과 비교하기에는 규모가 소박했다.
그보다는 목포의 도심을 향해 양팔을 벌린 예수가 어떤 글자 위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응.”
“그런 꿈을 꿨어?”
전화로 꿈 얘기를 하자 수정은 반문했다.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약간 서운하고 허망했다.
이혼할 때도 딱 그 정도의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이혼 후 목포에 정착한 그녀에게 왜 목포냐고 물었을 때도.
“어릴 때 한 일 년 정도 산 적이 있어. 그때 기억이 나쁘지 않았어.”
일 년을 산 목포에서의 기억이 십 년을 산 나와의 시간보다 나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왜 하필 버스 기사냐고 물었을 때는 달랐다.
“뭐가 문제야? 하필 기사인 게, 아니면 하필 버스인 게?”
아직 날이 서 있었다. 건강한 심장이 숫돌이 되어 매일매일 잊지 않고 마음속의 칼날을 가는 것만 같았다. 칼날이 나를 향할 때면 움츠러들었다.
“아직 못 만났어?”
“응.”
“기다려봐. 오겠지.”
수정은 운행할 시간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음이 지나치게 경쾌했다. 습관적으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읽지 않은 문자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글자를 확대해 살펴보니 대출금 이자 납부 독촉이었다. 공연히 심사가 틀어져 순백의 예수상을 삐딱하게 올려다봤다. 눈이 부셨다.
안질로 예민해진 눈은 조금만 강한 빛을 받아도 참을 수 없이 시리고 눈물이 났다. 선글라스를 찾아 꼈다. 세상이 검게 필터링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언젠가는 완벽히 검은 필터가 내 망막을 차단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했다.
주변을 살피니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슬며시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렸다. 마스크 줄을 건 귀가 여전히 아프고 땅겼지만 그나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강철 공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렸다. 가까운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이었다. 반쯤 철거된 차단막 위로 높이 솟은 두 개의 종루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예배당을 신축하는 듯했다.
세 번 네 번 세 번 네 번,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쇳소리가 운율을 맞추듯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마치 좋을 치는 듯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루에서 나는 소리 같아 기괴했다.
세 번과 네 번의 사이였을 수도 있고, 네 번에서 다시 세 번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과민한 고막이 소음 속에서 스마트폰 벨 소리를 포착했다.
액정을 세 번 탭하는 동작으로 화면을 확대하니 발신자에 ‘방사장’이라 찍혀 있었다. 전화를 받으려는데 등 뒤에서 ‘여기, 여기!’ 하는 외침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마스크 줄을 한쪽 귀에만 걸고 어정쩡한 높이로 스마트폰을 든 중년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교복 차림이었다. 재킷이 더블 브레스티드 스타일이었다. 여섯 개의 앞단추가 세 개씩 이열종대로 늘어서 있었다.
공연히 헛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여섯 개의 작은 동그라미들이 규칙에 따라 빠르게 속을 검게 채우거나 비워가며 조합을 거듭했다.
그러나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제대로 익히려는 의지와 노력, 시간 모두 부족했다.
점자를 배우기로 한 건 안과에 다녀온 직후였다.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점자 학습을 권했다는 말은 아니다.
담당 의사는 충분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고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관리하면서 쓸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써야죠.”
황반변성과 급성녹내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관리를 소홀히 한 내가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일 년 전에 그는 조심스럽게 실명 가능성을 예측했다. 몇 달 전에는 진행 속도가 빠르다고 경고했다.
안정된 관리를 위해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상세히 일러주고 몇 개의 점안액을 처방해주었다.
뻔한 결과를 알고도 성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놓아버릴 결단과 매달릴 각오 어느 쪽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차피’와 ‘그래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시간이 흘러버렸다.
점자를 배우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라기보다는 어차피와 그래도를 오락가락한 결과였다.
어차피 시력이 나빠지고 있으니 그래도 배워두면 좋지 않겠나 하는, 딱 그 정도.
소강의실이라고는 해도 서너 명이 앉아 수업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감염병 대응 방침에 따라 마스크를 쓴 채 간격을 넓혀 앉았다. 낯설고, 긴장되었다.
그리고 막상 점자 받침대와 철필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느꼈던, 혹은 굳이 외면하고자 했던 어떤 것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단순히 외우고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선과 면과 색의 상실, 빛의 단절에 대한 자각이었고 절대 암흑에 대한 일종의 선취였다. 자괴감은 부록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주에 결석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자서전 대필 주문이 뜸해지면서 대출금을 대출금으로 갚아야 하는 상황에 몰려 은행에서 관련 내용을 상담하느라 수업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세 번째 주에 출석했을 때 잊고 있던 공포와 자괴감이 다시 몰려왔다. 도저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슬그머니 가방을 싸서 나와 버렸다.
수정에게서 온 전화를 받은 건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실내는 한산했다. 시력이 이미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에 다음 정차역을 표기하는 안내판이 보이지 않았다.
온전히 안내방송에만 의지해야 했다. 자칫 안내방송을 놓치면 되돌아오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스피커의 소리가 작아 신경이 곤두섰다.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안내방송에 집중했다. 진동은 두세 번 더 울리다가 그쳤다.
안내방송 음성이 석수를 발음하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잠시 더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입문 앞으로 갔을 때 진동이 다시 울렸다. 열차가 빠르게 감속했다.
액정을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려 화면을 확대했다. 아내였다. 이혼 후에도 간간이 통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밤이었다. 취했거나 취하고 싶거나 취할 수 없을 때.
낮에 전화가 온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걱정과 설렘이 동시에 들었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출입문과 플랫폼 사이의 간격이 넓으니 조심하라는 안내 음성이 흘렀다. 문이 열렷다.
“뭐 하느라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수정은 짐짓 호통을 쳤다. 밉지 않은 말투였다. 곧 용건을 말했다. 자서전을 쓰려는 사람이 있으니 목포에 내려와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내가 함께 만나면 좋겠지만 일해야 하니까. 끝나는 시간 봐서 연락할게.”
수정에게 이런 일로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자존심을 세울 만치 여유롭지 않았다. 궁핍함은 사람이 모날 틈을 주지 않으니까.
수정은 통화 중에 방 사장이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미리 말해놨으니 연락하면 알 거라 했다.
“요즘은 소설 안 써?”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쓰는 것도 안 쓰는 것도 아닌 형편이었다. 어차피 원고청탁이 들어오지도 않는 데다가 써봐야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라도 주는 문예지가 적었다.
소설을 쓰고 앉아있기에는 생계가 급했고 안 쓰기에는 마음이 곤궁했다. 시력까지 나빠지니 소설 쓰기가 더욱 곤란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수정이 다시 말했다.
“기왕 여까지 왔는데 쓸 수 있을 때까지 써야지.”
기시감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담당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관리하면서 쓸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써야죠.
소설도 써야 하고 눈도 오래 써야 했다. 정작 필요한 건 사채라도 써야 할 만큼 다급한 궁핍함의 해결이었다.
서둘러 방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다음 날 보기로 했다. 목포로 내려가겠다고 하니 산정동으로 오라 했다.
가톨릭 목포 성지.
그곳으로 오면 예수가 보일 거라고, 그 밑에서 보자고. 그러겠노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