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에게 많이 주신 것과 적게 주신 것은?"
저는 '우울은 수용성이다'라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우리를 얽매는 우울이 실은 물에 씻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땀을 흘리든 샤워를 하든 물에 씻겨나간다는 뜻입니다. 우울이 우리를 한 입씩 먹어치울 때마다 가장 먼저 포기했던 것을 떠올려 볼까요. 저는 며칠을 꼬박 씻지 않고, 침대 위에서 꼼짝달싹 하지 않습니다. 운동은 커녕 씻는 것 조차 포기해 내가 무기력해지도록 내버려 두기 바쁘지요. 그에 반해 삶에 활력이 가득할 때는 아침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루에 두 번 이상 나가고, 딱히 외출할 일이 없어도 샤워를 합니다. 땀에 절은 운동복을 벗어던질 때, 은은한 비누향 바디워시 냄새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속 안의 때묻은 무기력을 꺼내어 씻어 놓는 것처럼요. 실제로 물과 가장 친한 운동, 수영은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물결과 호흡에서 오는 리듬이 명상 상태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준다네요.
오늘은 '수용성'이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수용성의 뜻은 표기하는 사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영양학 사전에서는 '극성 용매인 물에 용해되는 성질', 차생활문화대전에서는 '비타민류 중 물에 녹은 성질을 가진 비타민', 농업용어사전에서는 '어떤 물질이 물에 용해되는 성질'이 됩니다. 다만, 현상학 사전에서 수용성은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쓰여 있지요. 전자의 수용성(水溶性)은 물 수, 녹을 용, 성품 성을 쓰고 후자의 수용성(受容性)은 받을 수, 얼굴 용, 성품 성으로 한자는 달라도 수용성은 물의 특성을 고스란히 이용한 말이 되었습니다. 물은 어디든 뒤섞이고, 어디든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수용성이라는 성질에 양껏 매료되어 있으니 제가 물과 아주 친할 것 같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할 줄 아는 수영은 고개를 뻣뻣히 들고 손과 발을 이용해 물을 해치고 나아가는 개헤엄과 2미터 정도 나아갈 수 있는 배영이 전부거든요. 물과 친했던 시절은 외할머니인 소분 씨를 따라 갔던 목욕탕의 냉탕에서 바구니를 튜브 삼아 놀았던 때뿐입니다. 소분 씨는 다라이라고 부르는 하얀 바구니로 튜브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위 아래로 합치면 갇힌 공기에 부력이 생겨 둥둥 떠 있을 수 있었어요. 튜브 다라이를 앞으로 내밀고 얼굴은 물에 콕 박고 물장구를 치면 물개라도 된 것처럼 쭉쭉 나아갔습니다. 고개를 들기 어려우니 숨은 꾹 참은채로요. 물결과 함께 숨을 쉬는 법, 다라이 없이 팔을 휘젓는 법조차 모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무턱대고 발등으로 요란스럽게 물을 쳐대기 바빴던 물장구가 어떤 파도를 만들어 냈는지 조차 모르면서요. 나만의 수영법으로 혼자 만족했어도 되던 때, 물과는 친했어도 수용성이랑은 거리가 멀던 시절입니다.
수용성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수용성이라는 말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뒤로는 공격성만 차곡차곡 키워나갔고, 말을 잘 조합해서 상대에게 최선으로 상처주는 방법을 연마하기도 했으니까요. 나의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다 멍청이고 바보이며 무식하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나를 생각해 말하는 것들 또한 듣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리고, 눈까지 감아버렸습니다. 날마다 뾰족해지니 많은 사람과도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자주 돌아보게 되었어요.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을 복기하는 연인처럼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언틸 투모로우(#untiltomorrow) 해시태그를 보았습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지난 자신의 모습을 올리면서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내일까지만 게재한다는 캠페인이었어요. 내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작용이 되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꾸미기를 좋아했던 자신의 모습을 올리면서 덧붙였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미쳤네', '너무 부끄럽다'면서요. 아무 생각 없이 '왜 이러냐'고 그들을 놀렸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때의 나, 왜 그랬냐'에서 '어쨌건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로요. 지난 내가 시대의 흐름과 상황과 행동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홀로 싸워왔기에 지금 이런 생각 또한 할 수 있는 것 같다고요.
시민들과 인터뷰하는 예능 프로,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 "신이 '나'라는 사람을 빚으며, 나에게 적게 넣은 것과 많게 넣은 것은?"라는 질문에 어른들은 말했습니다. 42세 김순미 씨는 "성실함 그런 거는 많이 넣어주셨는데, 근데 제가 좀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에요. 사람들을 이끌고 그런 거는 좀... 용기는 좀 부족하게 주신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45세 박상준 씨는 "많이 주신 것은 예쁜 눈?", 42세 고은선 씨는 "긍정적인 성격? 밝은 마음? 그거에 감사합니다~ 반대로 적게 주신 건 보이는 아름다움? 하하...", 52세 최애경 씨는 "하나님은 저를 잘못 만들었어요. 제가 얼굴이 도시락이에요. 마음에 안 들어요. 광대뼈를 너무 많이 주셨어. 없는 사람한테 주셨어야 하는데. 잘 주시는 건 시어머니가 그러는데 귀가 예쁘대요. 그럼 됐죠,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장면이 교차 편집되며 마지막으로, 초등학생 주은이는 말했습니다.
"신께서는 저한테 남김없이 전부 다 주신 것 같아요!"
근육과 지방으로 두터운 허벅지, 툭 튀어나온 광대뼈, 누구에게나 잘해야 한다고 옥죄던 강박.... 적게 넣어주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주은이의 말처럼 신은 나에게 남김없이 전부 다 주셨을 텐데요. 부끄러운 어른들의 댓글이 죽죽 이어지고, 한 어른은 이렇게 적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건 부족하다 생각하는 내 마음이었구나'
다시 돌아가 수용성을 소리내 읽어봅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꼭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현실도, 미래도 관망하지 않고 살아내기 바빴던 저의 세월들을요. 그 속에는 온갖 구설수와 흑역사가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랐기에 행복했던 시절도,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괴로웠던 날들도 뒤섞여 있었습니다. 몇 년 전 한 여름에 콘서트 시작 전 굿즈들을 나눔 받겠다고 땡볕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던 기억,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주제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떠들었지만 알고보니 내가 주장한 것들이 틀렸던 기억, 이미 마음이 다 해 떠난 사람에게 몇 날 며칠 매달렸던 기억들... 이불을 뻥뻥 차는 기억들 위로 뿌리를 내린 오늘의 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한 여름 땡볕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았고, 내가 더 알아가야할 지식에 대해 고심할 수 있었고, 마음이 떠나기 전에 오늘의 사랑에 충실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수한 지난 시절의 내가 이끌고, 버티고, 당겨와서 만든 사람입니다. 죽고 싶다고 무기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내가 그래도 끊임없이 버텨주었기에, 무기력에 지지않고 '우울은 수용성이다'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샤워하고, 운동하기를 멈추지 않았었기에, 마땅한 성과 없이 묵묵히 살아내줄 것이기에 모든 날의 내가 있겠지요.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은이는 말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갑자기 꼭 껴안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거요."
돌아보면서도 계속 안아주고 싶었던 지난 날의 나와 함께 누워봅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조금 더 믿게 됩니다.
분명 신은 우리에게 남김없이 전부 다 주었을 테니까요.
* 주은이의 인터뷰 영상입니다. 같이 보고 싶어 공유합니다.
https://youtu.be/Ne4H1lxHh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