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나는 원래 어디서든 속한 집단의 기준에 맞춰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특별히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는데, 꽤 오래전부터 몸에 붙어 있었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다.
잘한다는 기준이 비교적 분명했고, 그 기준 안에 있으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을 맡으면 최선을 다해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고, 회의에서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게 말하고, 윗사람들이 보기 좋아할 만한 태도를 유지하면 결국은 잘하고 있는 거라는 믿음이었다.
방식만 바뀌었을 뿐, 잘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잘한다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회사에서도 소위말하는 잘한다는 기준에 맞춰 행동하기 위해 나는 항상 초조했다.
그래서 더 튀지 않으려고 했다.
회의에서 손을 들기 전에는 한 번 더 생각했고, 하고 싶은 말보다는 이 분위기에서 가장 무난한 답을 고르는 데 시간을 썼다.
학생 때는 정답이 비교적 분명했지만,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신 눈치와 맥락이 정답처럼 작동했다.
내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보다, 이 조직이 지금 원하는 온도를 맞추는 데 더 집중했다.
말투, 표정, 메신저에 찍는 이모지까지도 계산의 대상이 됐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나면, 침대에 누워 계속 누워만 있었다.
일을 할수록 내 주관은 얇아졌다. 스스로 판단하는 감각보다는, 앞에서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가는 능력만 남았다.
잘하려고 했는데도 결과는 내 뜻대로 가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꾸 잊어버리게 되었다.
“잘하려고 나를 이렇게까지 없애가려고 하는데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구나”
그 생각이 어느 날 퇴근길에 문득 떠올랐다.
그 이후로 주변을 조금 더 유심히 보게 됐다.
말이 빠른 사람,
다양한 의견을 던지는 사람,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
우회적으로 말하는 사람,
쿨한 사람,
조심스러운 사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알게 됐다.
회사에서는 ‘잘해야 하니 잘 맞춰서 해야겠다’는 전략이 생각만큼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면 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자기 방식이 분명해서 더 편해 보였다.
그 순간부터, 내가 나를 없애가며 맞추고 있던 방식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 맞추기 위해 나를 없애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면서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게 정답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모든 순간을 계산하며 움직이지는 않게 됐다.
회의에서는 맥락에 맞지 않아 보여도 나의 생각을 말해보고 회사에서 같이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을 줄이고 있다.
요즘은 집에 오면 예전보다 기운이 남아 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됐다.
잘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잘 맞추느라 나를 지우던 시절보다는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