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마음을 건네는 존재들에 대하여
하루 종일 형광등 아래에 갇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캐비넷으로 들어가지 못한 서류 뭉치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고, 나는 그 견고한 벽 안에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꺼지지 않는 사무실의 불빛들은 마치 도시가 내쉬는 긴 한숨 같았다. 잠시라도 숨 쉴 틈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시청 근처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거리는 이미 저녁을 해결하러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시청과 경찰청에서 나온 낯익은 잠바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향했다. 그 소란스러운 활기 속에서 나는 기묘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수많은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지만, 그중 내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뼈저리게 와닿는 순간, 발길은 자연스레 인적 드문 골목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 녀석이 있었다.
가로등이 막 졸린 눈을 뜨기 시작한 대문 앞, 어둠이 내려앉은 구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검은 털은 밤의 조각처럼 번들거렸고, 나를 향해 고정된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움직임은 없었지만, 그 시선은 조용히 내게로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낯선 생명과 나 사이에 얇고 투명한 공기의 막이 생겨난 듯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짧은 숨결 같은 시간. 나는 홀린 듯 녀석에게 다가갔다.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이 쉼 없이 보여주던 영상 속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친 하루 끝에 무심히 보던 영상들 속에서, 고양이는 낯선 손길에 기꺼이 뺨을 부비고 체온을 나눴다. 그 화면 너머의 따뜻함이 그리웠던 걸까.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낮추더니 벌러덩 드러누워 하얀 배를 보였다. 가장 약한 곳을 보여준다는 것, 그것은 경계의 해제이자 무구한 신뢰의 신호였다. 그 무방비한 몸짓 하나에 세상에 대해 곤두세웠던 내 마음의 가시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작은 생명이 내어준 곁에, 도리어 내가 위로받고 있었다.
무언가라도 주고 싶어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갔지만, 고양이 간식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개 간식 코너에 있는 말린 닭가슴살을 사 들고 돌아왔다. 봉지를 뜯어 내밀자 녀석은 냄새를 킁킁 맡더니 몇 점 깨작거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걸까. 머쓱해하던 찰나, 옆집 대문이 열리며 중년의 아저씨가 나왔다.
“얘야, 밥 먹자.”
아저씨의 손에는 익숙한 사료 그릇이 들려 있었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꼬리를 바짝 세우고 그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에게는 이미 자신을 돌보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구원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 녀석이 굶주린 떠돌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문득, 지난주 수요일의 기억이 겹쳐졌다.
부모님과 함께 찾았던 조부모님의 산소. 그 적막한 묘역 한쪽에도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절을 올리는 우리 발치에 얌전히 앉아 떠나지 않던 녀석. 떠난 이를 기리는 엄숙한 죽음의 공간과, 오늘처럼 삶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골목. 전혀 다른 두 공간에 고양이가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디쯤에서, 생명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직장 생활 30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말을 쏟아내며 살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말과 사람 속에 파묻힐수록 마음은 점점 고요한 사막이 되어갔다. 우리는 언어로 세상을 다루고 소통한다고 믿지만, 때로는 그 언어가 마음의 벽이 되기도 한다. 말로 전하지 못한 진심이 쌓이고, 오해를 풀기 위해 더 많은 말을 만들어내는 사이, 정작 마음의 본질은 희미해진다.
고양이는 그런 복잡한 언어를 모른다. 대신 몸짓으로, 눈빛으로, 곁을 내어주는 기척으로 말한다. 그것은 말보다 정확하고 침묵보다 따뜻하다.
요즘 사람들이 퇴근길 지하철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멍하니 고양이 영상을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혼자 사는 집의 불빛은 늘어가고, 대화는 납작한 텍스트와 이모티콘으로 대체된 시대. 웃고 있는 이모티콘 뒤에 숨겨진 쓸쓸함을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한다. 하지만 의도 없는 눈빛으로 다가오는 저 작은 생명 앞에서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오직 생명의 온기뿐이다.
아저씨를 따라갔던 고양이가 다시 대문 앞으로 돌아와 몸을 말고 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녀석의 등을 포근한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잠시 그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잠시의 산책이 내 마음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서류를 마주해야겠지만, 이제는 그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질 것 같다. 생명은 거창한 말 없이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해준다.
가끔은 백 마디 위로보다 곁에 머무는 침묵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지만, 오늘 밤 고양이가 내게 그랬듯 잠시 옷깃을 스치며 온기를 나눌 수는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복잡한 말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존재. 그 짧고 투박한 교감이,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다시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