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oodbye, 맨발에게 배우다
퇴근길 지하철 3호선은 짓눌린 피로와 낯선 숨결들로 가득했다. 텁텁한 공기 속에는 눅진한 땀 냄새와 향수인지 섬유유연제인지 모를 인위적인 향이 뒤섞여 맴돌았다. 덜컹거리는 소음은 서로의 긴장을 더욱 밀착시켰고, 나는 구겨진 옷깃들 사이에서 습관처럼 휴대폰 화면을 문질렀다.
고백하자면, 나는 새로운 소리를 듣는 데 인색한 사람이다. 음악은 이미 검증된 과거의 유물, 이를테면 통기타의 거친 나무 울림이나 LP판의 지직거리는 잡음에서나 안식을 찾는다. 요즘 아이들의 매끄러운 기계음은 소란스러운 타국어처럼 겉돌았다. 낯선 것을 견디기보다 익숙한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의식이 내게는 편안함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무심하게 화면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어폰을 꽂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 속, 무대 위의 그녀는 아이보리색 드레스 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그 풍성한 주름 아래로 드러난 것은 아찔한 킬힐이 아니라 창백한 맨발이었다. 의도적으로 흘러내린 어깨 끈, 짐짓 흐트러뜨린 스커트의 실루엣.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헐거움이, 완벽함을 강요하는 모든 세상에 던지는 서늘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관능적인데 어딘가 위태롭고, 당당한데 곧 부서질 듯 처연한 모순. 그 낯선 이미지가 시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맨발.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차가운 바닥을 딛고 서 있는 그 무방비한 상태. 잘 다려진 제복 대신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휘감은 그 위태로움이 역설적으로 내 견고한 방어막을 두드렸다.
그때, 객석에서 배우 박정민이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구두. 그것은 맨발과 순백의 드레스가 만들어낸 무채색의 슬픔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선홍빛 파열음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허공을 향해 손을 툭, 툭 털어냈다. 현란한 기교도, 끈적한 접촉도 없었다. 그저 "질척이는 건 질색이야"라고 뇌까리듯, 손목을 가볍게 터는 그 건조한 몸짓이 명치끝을 쳤다. 쿨한 척하지만 실은 가장 뜨거운, 서늘한 위로가 그곳에 있었다.
이윽고 화사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매끄럽게 세공된 보석이 아니라, 거친 파도에 수만 번 깎이고 패인 원석의 질감. 날카로운 고음 대신 바닥으로 묵직하게 깔리는 저음이 ‘Good Goodbye’를 읊조릴 때였다.
예고도 없이 밀려든 묵직한 비애(悲哀)가 텅 빈 흉곽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리듬은 세련되고 가벼운데, 그 위에 얹힌 목소리는 소중한 것을 기어이 놓아주려는 사람의 마지막 눈맞춤처럼 젖어 있었다. 슬픔을 무기로 휘두르며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는 듯한 절제. 해피엔딩인 척 웃어 보이지만 기어이 눈물이 고이고 마는 품격 있는 슬픔. 그것이 내 가장 약한 환부를 찔렀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것들과 헤어졌다. 사람과, 시절과, 나 자신의 꿈과 작별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번이라도 '좋은 이별'이 있었던가. 늘 쫓기듯 도망치거나, 상처받기 싫어 먼저 문을 닫아걸거나, 괜찮은 척 덤덤하게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에 코를 박았다. 지하철 안이 아니었다면, 타인의 시선이 빽빽한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주책없이 꺽꺽거렸을지도 모른다. 눈가에 맺힌 뜨거운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상만사를 다 아는 척하며 살아왔으면서, 정작 나 자신의 마음은 한 번이라도 저토록 솔직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삼십삼 년. 나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공직의 순환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무던한 사람'이라 포장해왔다. 격한 감정은 미숙함의 증거라 여겼고,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제가 아니었다. 그저 마비된 것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익숙하고 편안한 신발 속에 발을 가두고 사느라, 발바닥의 감각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낮에는 말끔한 얼굴로 회의에 참석하고, 사람들 앞에서 논리와 이성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 완벽한 연기가 끝난 뒤, 텅 빈 무대 뒤편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화사의 맨발은 내게 묻는 듯했다. 당신이 매일 아침 무심히 고르는 익숙하고 편안한 신발 속에, 아직 뜨거운 피가 도는 발이 숨어 있느냐고. 규격화된 문서와 숫자의 감옥에 갇혀, 정작 당신이 돌봐야 할 당신의 내면은 외면하고 있지 않느냐고.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요즘 것들'의 문화라며 폄하했던 그 낯선 몸짓 뒤에, 이토록 처절한 예술가의 고뇌와 서늘한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온몸으로 부딪쳐 깨지면서 진짜를 노래하고 있는데, 나는 그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려 했다. 4분 남짓한 영상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죽비 소리였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빈틈없이 채워진 강박이 아니라, 흘러내린 어깨 끈처럼 살짝 드러난 틈, 그 사이로 배어 나오는 '진짜'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잘 정리된 엑셀 파일이 아니라, 예고 없이 툭 터져 나오는 울음이나 무방비하게 드러낸 맨발 같은 것들에 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끝났다. 방 안에는 멈추지 못한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깊숙이 몸을 묻었던 소파에서 손을 뻗어 외투 안주머니의 공무원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카드가 내는 가벼운 소리가 텅 빈 거실에 번졌다. 오늘 하루의, 그리고 지난 수많은 날들의 마침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