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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 그 숫자 너머의 사람들을 위하여

부산의 자살률 그래프를 꺽기 위한 3일간의 기록

by 박계장

야근을 마치고 시청 후문을 나서자 날 선 밤공기가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 같더니, 어느새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성큼 들어와 있다. 나는 습관처럼 지하철 시청역을 지나쳐 연산역을 향해 걷는다. 시청역에서 타 봐야 고작 한 정거장 뒤 연산역에서 환승해야 하기에, 그 번거로움을 핑계 삼아 운동도 할 겸 10분 남짓한 거리를 걷는 것이다.


차량들의 붉은 미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330만 시민이 살아 숨 쉬는 이 도시는 밤에도 멈추지 않고 분주히 흐른다. 매일 마주하는 퇴근길 풍경이지만, 어떤 날은 저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납 덩어리처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를 때가 있다. 단순히 야근의 피로 탓은 아니다. 저 수많은 불빛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위태로운 구조 신호가 깜빡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직업적 부채감 때문이다.


내 사무실 사물함에는 A4 용지 넉 장이 붙어 있다. 그 종이 위에는 건조하지만 서늘한 숫자들이 적혀 있다.


'30.3' 그리고 '989'.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30.3명. 이 냉정한 지표는 작년 한 해 동안, 이 도시에서 989명의 이웃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광역시 중 최상위권이라는 오명보다 더 아픈 것은, 그 숫자가 행정력이 미처 닿지 못한 사각지대의 크기이자 우리가 놓쳐버린 손길의 횟수라는 점이다. 서부산의 공단부터 산복도로의 비탈진 골목, 해운대의 화려한 빌딩 숲까지. 우울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도시 곳곳에 안개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넓은 도시의 마음 건강을 책임져야 할 우리 팀의 현실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우리 팀에서 자살 예방 업무를 전담하는 주무관은 말수가 적고 묵묵한 직원이다. 그는 매일 쏟아지는 시의회의 날 선 질타와 언론의 자료 요구, 그리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으라는 압박을 홀로 감내해 왔다. 330만 시민의 생명과 직결된 업무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짊어지고 있는 그의 굽은 등을 볼 때마다, 팀장인 나는 깊은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타 시도의 넉넉한 인력 현황표와 우리 팀의 초라한 현실을 번갈아 보며 느꼈던 자괴감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는 그 직원에 대한 미안함으로 번지곤 했다.


조직 신설이 절실했다. 그것은 단순히 업무량을 줄이기 위함이 아니라, 행정이 비로소 제 기능을 하기 위한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자살예방팀' 신설 계획안을 들고 조직부서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하지만 벽은 높고 단단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총액인건비제와 정원 동결 원칙상 인력 순증은 어렵습니다." 효율과 규정을 앞세운 조직부서의 답변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현장의 절박함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차가웠다.


견고했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지난여름이었다. 안타까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고, 특히 학생들의 비극적인 선택이 보도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우리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보고서를 썼다. 자살 원인을 분석하고 타개책을 망라하며, 멈춰 있던 톱니바퀴를 다시 돌려야 했다.


변곡점은 12월 1일, 시장님 주재 정책회의에서 찾아왔다. 노인 자살 문제가 화두가 된 그 자리에서 시장님은 자살 예방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관심과 지원의 문제'로 명확히 규정했다. 내년도를 '자살 예방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꽉 막혀 있던 혈관을 뚫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의 시간은 숨 가쁘게 흘렀다. 기획관실 주도로 행정부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자살예방대책추진본부'가 꾸려졌고, 바로 어제인 12월 3일, 드디어 우리 부서가 준비한 전담팀 신설안이 보고되었다. 기획관리실장님과 행정부시장님께 보고를 드리던 순간, 나는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며 찾아오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실무선에서 수없이 부딪히며 깨졌던 문제들이 최고 결정권자의 의지와 부서 간의 협업으로 단숨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오늘은 12월 4일. 달력의 숫자는 평소와 다름없지만, 내 업무 수첩은 이미 미래의 시간들로 빼곡하다. 당장 닷새 뒤인 9일에는 킥오프 회의가, 그 뒤로는 실무 회의들이 이어진다. 내년 1월 1일 자로 팀은 신설되겠지만, 실제 사람이 채워지는 건 2월 정기 인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고단할 테지만, 마음의 온도는 전과 확연히 다르다.


이제 비로소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개인의 헌신과 희생에만 기대어 위태롭게 버티던 방식에서 벗어나, 조직적으로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자살 예방 사업이 시정의 핵심 아젠다로 격상되면, 난항을 겪던 센터 인력 확충이나 예산 확보에도 큰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시 전체가 나서서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던 행정의 진짜 모습이다.


물론 팀 하나가 생긴다고 해서 벽에 붙은 30.3이라는 숫자가 당장 '0'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복잡하고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내년 1월, 사무실 한쪽에 새로 자리 잡을 팀의 풍경을 미리 그려본다. 팀장 1명, 팀원 3명. 총 네 개의 책상과 의자. 누군가에게는 그저 책상 몇 개가 늘어난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네 자리는 우리 시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내디딘 가장 의미 있는 한 걸음처럼 보인다.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간다. 여전히 밤공기는 차갑지만, 발걸음만은 한결 가볍다. 내일 출근하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지만,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우리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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