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 외면했던 비극의 사슬을 끊기 위하여
작은 회의실 벽걸이 TV 위로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배경은 지하철 통로였다. 길게 이어진 흰 벽 사이, 덩그러니 놓인 기둥 아래 한 남자가 무너지듯 기대앉아 있었다. 흐릿하게 처리된 얼굴, 때에 절어 본래의 색을 잃은 겉옷, 흐트러진 매무새... 그가 거리에서 견뎌온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최신형 TV 스크린은 선명했지만, 나는 화면 너머에서 훅 끼쳐오는 냄새를 맡은 듯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지하 공간 특유의 눅눅한 먼지 냄새, 그리고 오래된 술과 땀이 뒤섞인 시큼한 체취 같은 것들.
그 냄새의 한가운데, 우리 시가 민간 전문기관에 위탁하여 운영하는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의 여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남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차가운 시멘트 바닥 가까이 몸을 잔뜩 낮춘 자세였다. 사진에는 소리가 없었으나 그 침묵은 웅변보다 강렬했다. 거절당하고 다시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 혹은 며칠 뒤 꼭 다시 보자는 간절한 약속이 오가는 순간이었으리라. 한 장의 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높이에서 같은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것은 4분기 운영위원회 회의 장면이었다. 나는 부산시청에서 정신건강 업무를 총괄하는 팀장이다. 같은 행정 시스템 안에서 일하지만, 안온한 회의실에 앉은 나와 달리 지하철 통로의 냉기와 거친 바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그들이다. 나 역시 부산역을 오가며 비슷한 풍경을 마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늘 멈칫하다가, 결국은 모른 척 시선을 거두곤 했다. 도울 방법을 모른다는 막연함은 비겁한 핑계가 되어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내가 외면하고 지나친 그 자리에, 사진 속 그녀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팀장으로 부임한 후, 나는 자살예방사업에 매진했다. 전담 조직을 꾸리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숱한 보고서와 계획서를 쓰며 바쁘게 뛰었다. 분명 시급하고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숨 가쁜 질주 속에서 알코올 중독 예방 사업은 늘 '다음'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여력이 없다'는 논리로 마음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술에 관대한 삶을 살아왔다. 야근 후 들이키는 맥주 한 캔을 '고생한 나를 위한 보상'이라 여겼고, 회식 자리에서 오가는 술잔을 조직의 단합이라 믿었다. 과음 끝에 벌어지는 실수에도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며 너그럽게 넘기곤 했다. 술자리를 관계의 윤활유로 삼으면서도, 그 술에 발목 잡혀 중독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는 "의지가 약해빠졌다"며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 그 이중적인 모순 속에 나 역시 안주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회의 중 들려온 현장의 이야기는 아팠다. 사진 속 남자는 며칠 상담을 받고 사라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나는 쪼그려 앉은 직원의 무릎과 허리를 생각했다. 딱딱한 바닥에서 일어나며 느낄 그 단단한 피로감은 행정 문서의 어떤 통계로도 잡히지 않는 무게일 것이다.
그녀들은 사례 관리하던 대상자가 예고 없이 증발해 버릴 때, 단주를 이어가던 이가 이웃의 "한 잔쯤은 괜찮다"는 가벼운 권유에 무너져 다시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날 때,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심지어 감사 대신 비난을 듣는 날도 많다고 했다. 중독을 질병이 아닌 개인의 일탈로만 보는 시선 탓에, 그들의 오랜 돌봄은 가려지고 실패의 장면만이 쉽게 평가된다.
내년도 중독 관련 예산은 인건비 자연 증가분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삭감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예산서의 얇은 한 줄 뒤에는 응급실 방문, 경찰 출동, 가정 폭력, 실직, 그리고 소중한 생명의 상실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비극의 사슬이 얽혀 있다. 우리가 지금 아낀다고 믿는 그 돈은, 머지않아 더 혹독한 사회적 비용이 되어 청구될 것이다. 중독 관리는 시혜가 아니다. 도시의 균열을 막아내는 마지막 안전망이다.
올해 나는 자살예방팀 신설에 힘을 쏟았고, 내년이면 그 팀이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통계표 위에서 자살과 알코올 중독은 별개의 항목이지만, 사람의 삶 속에서 두 문제는 너무나 자주 만난다. 술은 우울을 증폭시키고, 위태로운 마음을 벼랑 끝으로 떠민다. 이 두 흐름을 따로 떼어놓고는 어떤 문제도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
복도를 걷는데, 시청의 말끔한 흰 벽 위로 지하철 통로의 그 얼룩진 흰 벽이 겹쳐 보였다. 예산서를 펼칠 때도 그 장면이 어른거렸다. 서류 위에서 도시를 다룬다고 자부했던 내 손끝이 부끄러웠다. 진짜 도시는 서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 낮은 곳에 있었다.
나는 아직 거창한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예산서를 들여다볼 때마다, 정책을 입안하는 모든 순간마다 그 사진을 기억하려 한다. 우리 사회의 너그러운 술 권하는 문화가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낳는지, 알코올 중독자의 재활을 돕는 일이 왜 이 도시를 지키는 일인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설득해 나갈 것이다.
지하철 통로를 지날 때면 아마 오랫동안 그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기둥 아래 위태롭게 기댄 한 사람과, 그와 같은 높이로 기꺼이 무릎을 굽힌 한 사람. 그 낮은 눈높이야말로 내가 공직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