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 한 세상 속에서 아이가 웃는다.
엄지손가락으로 무심코 넘기던 유튜브 쇼츠 화면 속이다. 고작 15초 남짓한 영상 속, 낯선 아이는 까르르 넘어가며 온몸으로 기쁨을 발산한다. 그 환한 웃음이 스마트폰의 차가운 액정을 뚫고 나와 소파 위로 쏟아진다.
나는 홀린 듯 그 영상을 반복 재생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웃음소리는 경쾌한데, 명치끝이 뻐근해진다. 화면 속 아이의 반달눈이, 젖내 날 것 같은 그 포동포동한 볼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어떤 장면을 기어이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저런 계절이 있었다. 내 아이가 나를 보며 세상 전부를 가진 듯 웃어주던 시절이. 하지만 나는 그 웃음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했다.
세상은 흔히 공직자에게 ‘칼퇴근’이나 ‘여유’라는 낭만적인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해가 지기 전에 퇴근하는, 안온한 삶일 거라 짐작한다. 그러나 그 시선 너머, 나의 공직 생활은 매일이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적은 봉급의 현실 속에서도 공복(公僕)이라는 의무감으로 감정의 밑바닥을 긁는 모진 민원들을 묵묵히 받아내야 했다. 특히 시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 나의 시계는 멈출 줄 몰랐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 밤 10시가 넘도록 사무실 불을 밝히는 날들이 허다했고, 한 달 80시간을 훌쩍 넘기는 초과근무는 차라리 일상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일상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이른바 ‘워라밸’을 찾아 승진을 뒤로하고 한적한 부서를 자처하기도 했다. 하나 나는 어리석게도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동기들보다 이른 시기에 시청에 입성했다는 자부심에 취해 스스로를 격무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필이면 아이들이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부모의 따뜻한 눈맞춤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나는 아이들의 재롱보다 결재판의 서명이 더 급했고, 가족과의 저녁 식사보다 상사의 인정이 더 고팠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자, 가장 중요한 가치인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그토록 목을 매던 승진이나 직책 같은 것들은, 계절이 바뀌면 흩어지는 낙엽처럼 덧없는 ‘한 끗’의 영광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현관문 도어락이 ‘띠리릭’ 소리를 내면 나는 습관처럼 숨을 죽였다. 거실은 고요했고, 아이들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그 닫힌 문이 안도감이었다. '다행이다. 깨지 않았구나.' 방이 세 칸이다 보니 아내와 두 아이가 하나씩 차지하고 나의 공간은 거실이다. 피곤한 몸을 소파에 뉘며 생각했다. 내가 밖에서 흘린 땀방울이 저 닫힌 문 안의 평온을 지켰다고 믿었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 착각했다.
사실 내게는 아이들이 “아빠, 나랑 놀자”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살가운 기억조차 없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엔 맞벌이로 바쁜 우리 부부를 대신해 부모님과 여동생이 아이들을 도맡아 보살펴주셨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아내가 아이들의 세상 전부가 되었다. 나는 그 따뜻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겉도는 이방인처럼 주변을 서성였을 뿐이다. 애초에 등을 돌릴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항상 그들 ‘속’에 없었으니까.
몇 번의 거절이 반복되자, 아이들은 일찌감치 나와 교류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더 이상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지도, 소파에 누운 내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게 된 것이다. 그 빈자리는 오롯이 아내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보건교사라 나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아내는 아이들의 사계절을 빈틈없이 채워주었다. 학교 숙제부터 주말 나들이까지, 아이들은 모든 것을 엄마와 함께했다. 그렇게 셋이서 단단한 세계를 구축해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우리 가족이라는 문장에서 밀려나 ‘괄호 밖의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아이들의 키가 자라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늙어갔고, 아이들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웅크린 내 등 뒤에서 저들만의 계절을 통과했다. 유튜브 속 아이처럼 투명하게 웃던 내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무뚝뚝한 청년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제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나를 반기는 건 적막뿐이다.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예전엔 내가 원해서 닫았던 문이, 이제는 아이들이 원해서 닫은 벽이 되었다.
그 견고한 침묵 앞에서 나는 자주 서성인다. 내가 그토록 치열하게 좇았던 성취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아이가 처음 뒤집기를 하던 순간의 환호, 학교에서 돌아와 재잘거리던 사소한 하루, 아빠의 칭찬 한마디에 으쓱해지던 어깨. 돈으로도, 승진으로도 살 수 없는 그 반짝이던 시간들을 나는 너무 쉽게 ‘나중’으로 미뤘다. 그 나중은 영영 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후회는 늘 막차처럼 늦게 도착한다. 주변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먹고 사느라 바빠 자식에게 온전히 주지 못한 사랑을, 나이가 들면 손주에게 쏟게 된다는 말이다. 손주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이유는, 자식에게 미처 다 주지 못한 사랑의 앙금이 뒤늦게 흘러넘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슬픈 위안을 얻는다. 이미 닫혀버린 자식과의 시간을 억지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먼 훗날 내 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그 아이의 아이에게라도 내 못다 한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내 묵은 회한도 조금은 씻겨나갈 수 있을까.
그때가 오면 나는 절대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리라. 피곤하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지도 않으리라. 내 자식에게 건네지 못했던 다정한 눈맞춤과 살가운 온기를, 그 작은 생명에게는 아낌없이 쏟아붓고 싶다. 비록 순서는 엉키고 늦어버렸지만, 그것이 못난 아버지가 뒤늦게나마 사랑을 완성하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그렇게라도 나는, 내가 놓친 계절을 다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