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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1분의 의전(儀典)에 대하여

by 박계장

퇴근이 임박한 사무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들뜬다. 타닥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잦아들고, 동료들은 모니터 구석의 시계를 힐끔거린다. 아직 엉덩이는 의자에 붙어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하루를 마무리하거나 야근을 위한 저녁을 먹으러 갈 채비를 하지만, 나는 오늘 밤을 지새우러 가야 한다. 10분 전 입실. 이것은 당직의 불문율이자, 내가 동료들보다 먼저 사무실을 나설 수 있는 명분이다.


문을 열자 낯선 얼굴들이 어색하게 목례를 건넨다. 시청 조직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당직 때 만나는 직원들은 대부분 초면이다. 33년 차 고참인 나에게도, 시청에 전입온지 몇 해되지 않는 젊은 주무관들에게도 이 공기는 낯설기만 하다. 좁은 공간에 모였지만 사적인 대화는 없다. 우리는 식사 순번과 휴식 시간을 배분하기 위해 깍듯하지만 건조한 대화를 나눌 뿐이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번을 정해 다녀오시죠." 보드판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두고, 각자 자리에 앉는다. 나는 당직책임관석에 앉아 플라스틱 명찰을 가슴에 단다. 2018년 이후 7년 만의 당직. 정부 방침대로라면 내년부터 당직 제도는 재택으로 전환된다. 이 낡은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는 일도 내 공직 인생에서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밤이 깊어지자 전화벨 소리가 공간을 점령한다. 당직실은 도시의 배설물이 모이는 하수구다. 강변대로의 로드킬, 주택가의 고양이 울음소리, 불친절한 버스 기사, 택시 요금 시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은 예외 없이 격앙되어 있다. "선생님, 그건 구청 소관입니다. 해당 당직실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은 감정이 소거된 목소리로 매뉴얼을 반복한다. 그들은 민원인의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부서로 토스(toss)하는 인간 교환기 역할을 수행한다.


수화기를 든 직원의 등 뒤로, 오래전 구청 숙직 때의 기억이 겹쳐진다. 학장동 도로 한복판.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는 고라니 사체가 짓이겨져 있었다. 2차 사고를 막기 위해 경광봉을 흔들는 후배 직원을 멀찌기 두고 사체를 마대 자루에 담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던 축 늘어지는 무게감. 현행법상 로드킬 당한 동물은 '생활폐기물'로 분류된다. 한때 산을 뛰놀던 생명은 행정 절차를 거치는 순간 100리터 공용 마대자루에 담기는 '쓰레기'가 된다. 그날 트럭 짐칸에 던져지던 둔탁한 소리가, 지금 당직실의 전화벨 소리와 기묘하게 닮아 있다. 생명도, 분노도, 결국은 행정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처리해야 할 건수'로 환원된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전화기가 잠잠해진다. 창가에 서서 내려다본 부산의 야경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심하게 반짝인다. 변한 것은 유리창에 비친 내 희끗한 머리카락과, 곧 사라질 이 당직 제도뿐이다.


아침 7시. 창밖이 푸르스름해지고 있지만 당직실에 활기는 없다. 밤새 쏟아진 민원을 받아낸 직원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푸석하고, 밤새 의자 등받이에 눌린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뻗쳐 있다. 의자에 깊숙이 박혀 눈만 끔벅이는 모습은 방전된 건전지 같다. 그 정체된 공기를 뚫고 나만 일어선다. 재난상황실에서 전해진 '일일보고'를 통해 간밤의 화재를 비롯한 각종의 사고 발생 상황을 숙지해야 한다. 오늘은 특이사항이 없었다.


"특이사항 없음"


1층 로비로 내려간다. 오전 8시. 출근 전쟁이 시작되기 전, 로비는 거대한 동굴처럼 공허하다. 드문드문 도착한 직원들의 구두 굽 소리만이 높은 천장에 부딪혀 메마르게 울린다. 나는 그 적막을 가로질러 중앙 현관 유리문 안쪽에 자리를 잡는다. 유리벽 너머에는 청원경찰 두 명이 1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나는 시장과 부시장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짧은 동선 위에, 마치 미리 세팅된 가구처럼 서 있어야 한다.


"부시장님 차량 진입합니다." 청원경찰이 다가와 나직이 일러준다. 인이어로 운전원의 연락을 받은 모양이다. 곧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구두 뒤축을 모은다. 차 문이 열리는 순간, 밤새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준비한 대사를 뱉는다. "당직책임관 ㅇㅇㅇ입니다. 지난밤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부시장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고개만 까딱한다. "수고했어요." 그의 시선은 이미 엘리베이터 버튼을 향해 있다. 구두 굽 소리가 화강석 바닥을 울리며 멀어진다. 상황 종료. 1분도 걸리지 않았다. '특이사항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 있었던 내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특이사항 없는 아침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시장은 조찬 일정으로 출근이 늦어진다는 통보를 받았다. 덕분에 나의 의전은 이것으로 끝이다.


당직실로 돌아오니 방은 텅 비어 있다. 밤새 함께 민원인의 욕설을 견디던 그 '동지'들은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 9시 5분. 서운해할 일은 아니다. 그들에게 나는 전우가 아니라, 빨리 벗어나고 싶은 지난밤의 잔재였을 테니까. 가슴에 달린 '당직책임관' 명찰을 떼어내 벽에 붙은 플라스틱 명찰 보관함에 넣어둔다. 내 공직 생활의 마지막 당직이 책상 서랍 닫히듯 종결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행정 포털에 접속한다. '대체 휴무 신청' 버튼을 누른다. 사유: 당직 근무. 결재 상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연결 통로에 들어서자 12월의 서늘한 냉기가 훅 끼쳐온다. 출근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의 적막한 길.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 완벽한 보고를 마치고서야,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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