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일 수도
요즘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새벽 4시에 눈을 뜨면, 다시 잠들기 위해 뒤척이는 시간이 휴식이 아니라 고역처럼 길어진다. 이럴때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는다. 침대 위에서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기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4층 사무실로 올라간다. 시각은 6시 10분이다. 해가 뜨기 전의 시청사는 사람의 기척이 빠진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진다. 복도에는 냉기가 남아 있고, 밤새 대기 상태였던 복합기만 간헐적으로 낮은 구동음을 토한다.
불을 켜지 않은 채 내 자리로 걸어가 앉는다. 모니터는 아직 꺼져 있고, 창밖은 짙은 남색에 가깝다.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수납장 위에 붙여 둔 자살 관련 통계표를 본다. 네 장의 A4 용지가 어둠 속에서도 희끗하게 떠 있다.
그 종이를 붙일 때의 손끝을 기억한다. 모서리가 들뜨지 않도록 양면테이프를 눌러 붙였고, 들뜸이 생기면 다시 떼어내어 붙였다. 종이 위에는 숫자들이 줄을 맞춰 서 있고, 주요 수치 위에는 노란색과 빨간색과 파란색 형광펜 자국이 겹겹이 남아 있다. 그 자국들은 마른 소독약처럼 종이를 거칠게 만든다.
그 가운데서 한 숫자에 시선이 꽂힌다. “30.3명”이라는 숫자를 읽는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이라는 문장은 지나치게 매끈하다. 그 숫자 안에는 누군가의 망설임과 결심과 마지막 얼굴이 있었을 텐데, 종이 위에서는 모두가 같은 글꼴로 다려져 있다.
그 매끄러움이 비극을 통계로 정제하면서 죄책감까지 닦아 내는 방식이라고 느낀다. 숫자는 깨끗하고, 셀은 반듯하고, 보고서는 말끔하다. 그러나 내가 다루는 것은 원래 그렇게 말끔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기만이 견디기 어렵다.
12월 9일, 행정부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자살예방대책추진본부’가 출범했다. 시장의 지시는 명확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물리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고립된 이웃을 찾아내는 복지망을 촘촘히 만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계획과 예산과 실행으로 바꾸어 현실에 심어야 하는 실무 팀장이다.
그런데 모니터 속 “추진 계획(안)”이라는 제목을 볼 때마다 글자들이 바닥을 딛지 못하고 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일이 벌어진 뒤에야 표지를 세우고, 균열이 난 뒤에야 보강한다. 우리는 사후에 붙인 처방전을 ‘대책’이라고 부르며 결재를 올린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인력이 부족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살을 ‘고통의 끝’으로만 이해하고, 죽음을 ‘종료’라고 오해한다. 그 오해가 행정을 무력하게 만든다.
내가 그 오해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된 데에는 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저녁, TV를 켰고 리모컨으로 유튜브 화면을 불러냈다. 요즘 TV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어서, 한 번만 눌러도 세상의 인터뷰가 거실로 들어온다. 화면 속에는 의과대학 교수가 앉아 있었고, 진행자의 질문이 짧게 던져질 때마다 교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답을 이어 갔다.
그는 죽음을 비장하게 꾸미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도덕의 말로 재단하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이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남겨진 삶의 구조를 바꾸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 문장이 내 모니터 안의 결재선과 갑자기 맞닿는 순간을 겪었다.
행정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 본다. 죽음은 종료가 아니라, 해결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태다. 사람의 몸은 영혼의 그릇이기 전에, 삶이라는 현장에 지급된 유일한 도구다. 사과를 하려면 고개를 숙일 목이 있어야 하고, 빚을 갚으려면 일을 할 손발이 있어야 한다.
오해를 풀려면 말을 할 입이 있어야 하고, 슬픔을 흘리려면 눈물이 필요하다. 몸은 고통을 느끼는 감각기관이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다루는 유일한 장비다. 그래서 자살이 그 도구를 스스로 부수는 행위라는 문장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도구가 사라지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해결할 사람만 사라진다.
더 잔인한 속성을 ‘이관’이라는 단어에서 본다. 내가 휴직을 하면 내 책상 위의 미처리 서류가 사라지지 않고 옆자리로 옮겨 간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남은 사람의 일이 늘어난다. 죽음도 비슷한 모양을 가진다.
그 고통은 공중으로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옮겨 붙는다. 남겨진 가족의 가슴으로, 친구의 잠 속으로, 아이의 일상으로 넘어간다. 통계표 속 숫자 하나가 바뀔 때마다, 남겨진 삶이 새로운 위험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창밖에서 새벽빛이 퍼지기 시작한다. 중앙 공조는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엘리베이터는 도착음을 남기며 14층에 멈춘다. 누군가는 텀블러를 들고 들어오고, 누군가는 외투에서 찬 기운을 털어낸다. 나는 모니터를 켜고,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마주한다.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차가운 자판의 감촉이 손끝에 닿는다. 이것이 내 도구다. 숫자 옆에 사람의 자리를 한 칸 남겨 두고, 문장을 한 줄 더 적는다. 나는 아직 로그오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