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선배와 남겨진 나, 우리에게 남은 예의
일에 쫓겨 정신이 없을 때는 잊고 지낸다. 몰아치던 업무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고,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이 생기면 어김없다. 소란이 사라진 그 고요한 틈새로 예고도 없이 그가 찾아온다. 떠난 지 다섯 달. 여전히 그의 부재는 낯설다. 아니, 어쩌면 익숙해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병석에 있을 때 자주 찾지 못했다는 부채감 탓이었을까. 가족도 아니면서 나는 입관까지 지켜봤었다. 수의를 입고 누운 그는 고통을 다 벗어버린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긴 투병 기간 동안 이미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별 연습을 마친 가족들은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그 준비된 체념들 틈에서, 나는 뒤늦게 닥쳐온 상실을 감당하지 못해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우리는 20여 년 전, 시청의 한 팀에서 선임과 후배로 만났다. 공직 사회라는 곳이 으레 그렇듯 알게 모르게 줄을 세우고 편을 가르지만, 그런 잣대 위에서라면 나는 확실한 ‘그의 사람’이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붙들고 머리를 싸매던 밤들, 주말 산행에서 나누던 거친 호흡들. 그는 단순한 상사를 넘어 내 가장 치열했던 시절을 증명해 주는 전우이자 형제였다.
퇴직 후에도 마음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부구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고, 1년 남짓의 공백 후 어느 복지기관 대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우리는 핑계만 생기면 얼굴을 마주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함께 늙어갈 것이라 믿었다.
비극은 예고 없이, 가장 평범한 날을 골라 찾아왔다. 작년 1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밀린 잔무를 처리하던 내게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무실이지? 밥이나 먹자.” 등산을 다녀오는 길이라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연산로터리의 한 복국집, 김이 서린 뚝배기 너머로 마주한 그는 핼쑥했다. 13kg이 빠졌다고 했다. 덤덤하게 뱉어낸 병명은 췌장암 말기. 길어야 1년, 치료를 포기하면 6개월이라는 시한부 선고였다.
입안의 밥알이 모래처럼 까슬했다. 불과 다섯 달 전이었다. 완주에서 교육을 받다 혹서기 휴가로 잠시 내려온 부산의 여름은 뜨거웠고, 마주 앉은 선배의 얼굴은 그보다 더 맑았다.
퇴직 무렵 발견된 식도암은 다행히 초기였다. 수월하게 완치 판정을 받은 뒤, 선배는 몸을 돌보는 일에 빈틈을 두지 않았다. 취기가 오르면 기어이 후배들을 집으로 끌고 가 술상을 다시 받던 그 유난한 호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불가피한 술자리에서도 그의 앞에는 늘 술잔 대신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유리잔만 놓였다. 다시 맑아진 얼굴빛을 보며, 병마는 이제 그를 스쳐 지나간 짓궂은 손님 정도로만 여겼다.
이번엔 췌장이라고 했다. 그것도 끝자락이라 했다.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며,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투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가 식탁 위로 내려앉는데, 정작 국물을 뜨는 내 숟가락 끝만 달그락거리며 위태롭게 떨렸다.
봄이 오고, 업무차 들른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한 벙거지 모자가 낯설었다. 항암제로 솜털 하나 남지 않은 머리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잠겨버린 목소리와 짙어진 병색을 보며 직감했다. 우리에게 남은 계절이 그리 길지 않음을.
4월의 끝자락, 더 늦기 전에 볕 좋은 날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 마음들이 모였다. 그렇게 선배님을 모시고 송정 바닷길을 함께 걸었다. 미포까지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그의 등은 전보다 한 뼘은 작아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계산하려는 우리를 그가 굳이 막아섰다. 지갑을 여는 손길이 느렸다. “돈 쓸 데가 없다. 후배들이 시간 내준 것만도 고맙지.”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 식사 후 그는 기어이 대연동 자택까지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조금이라도 더 땅을 밟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우리는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 후로는 내리막길이었다. 입퇴원을 반복하다 걸려 온 전화 한 통. 호스피스로 옮긴다는 건조한 목소리가 마지막 육성이었다. 며칠 후 날아든 부고 문자는 예상했던 순서였음에도 날카로운 흉기처럼 일상을 베고 들어왔다.
그를 보내고도 나의 일상은 겉보기엔 매끄럽게 굴러간다. 출근하고, 회의하고, 서류와 씨름한다. 하지만 내면의 풍경은 달라졌다. 그의 부재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다. 내 옹졸한 마음이나 구차한 사정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며 받아주던 내 편이 사라진 것이다. 나를 증명해 주던 세계 하나가 통째로 허물어진 기분이다.
가끔 스마트폰 배경화면이 발치에 떨어진 낙엽처럼 마음을 툭 건드린다. 알고리즘은 무심하게도 사진첩을 뒤져 ‘자연’이나 ‘풍경’이라 분류한 장면들을 번갈아 화면에 띄워 놓는다. 기계가 갈무리한 산과 나무 사진들 틈에, 등산복 차림의 그가 불쑥 섞여 든다. 정상 표지석 옆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 혹은 호젓한 산길을 성큼성큼 앞서 걷던 뒷모습. 나는 한동안 액정 속의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버튼을 눌러 화면을 끈다. 굳이 애틋함을 보태거나 서러움을 들추지 않는다. 다만 그 시절 우리가 참 좋았다는 사실 하나만, 다시 어두워진 액정 너머로 조용히 밀어 넣어둘 뿐이다.
얼마 전에는 연락처를 정리했다. ㄱ, ㄴ, ㄷ 순으로 내려가다 마주친 이름 세 글자 앞에서 멈췄다. 이제는 신호가 가지 않을 번호. 지운다고 인연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겨둔다고 그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차분하게 삭제 버튼을 눌렀다. 잊기 위함이 아니라, 남겨진 자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정리 같은 것이었다.
오십도 꺾이고 보니 이별이 그리 유난스러운 사건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계절이 바뀌듯 누군가는 오고, 또 누군가는 간다. 그는 떠났지만, 곤란한 상황에서도 “허허, 괜찮다” 하며 넘기던 그 특유의 넉넉함은 내 삶의 태도 어딘가에 스며들었다.
그가 없어도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나는 또 내 몫의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먼저 길을 떠난 이에 대해, 남겨진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담백한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