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모시 적삼 속에 감춰둔 늙은 사내의 자존심
머리숱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그 사이로 희끗하게 올라오는 머리칼과 뺨 위에 피는 검버섯은 가릴 도리가 없다.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도 거울 속에서 선명하다. 쉰다섯. 숫자가 주는 무게감이 낯설다. 어릴 적 내게 오십 줄은 삶의 저편, 등 굽은 노인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숫자에 당도해 보니 여전히 삶의 한복판에서 흔들리는 중년이다. 거울 속 사내의 얼굴 위로 익숙한 잔영이 겹친다. 할아버지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얼굴이 지금 내 나이와 그리 멀지 않았다.
방학이면 부산 감전동 큰집에 머물렀다. 용호동 우리 집 단칸방에 비하면 그곳은 더할데 없이 넓고 부족함 없는 곳처럼 보였다. 반찬 장사를 하던 큰집의 오전 일과는 늘 산더미처럼 쌓인 고구마줄기를 다듬는 일로 시작되었다. 여름철 주력 반찬인 고구마순김치를 담그기 위해, 온 식구가 거실에 둘러앉아 손톱 밑에 검은 물이 배어들 때까지 껍질을 벗겨냈다. 어른들의 낮은 대화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그 시간은 내게 또 다른 정겨운 놀이였다. 고구마 줄기 더미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면 사촌 동생이 아이스크림을 한 아름 사 들고 왔다. 검게 물든 손으로 받아 든 차가운 품삯. 입안에서 서걱거리며 부서지는 그 단맛은 오전 내내 나누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였다. 도란도란 모여 앉아 온기를 나누던 널찍한 거실은 그 자체로 내게 충분히 근사한 세계였다.
거실의 시끌벅적한 온기와 달리 마당은 한산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시멘트 바닥이 드러난 마당 한구석에 벽돌을 투박하게 쌓아 올린 작은 화단이 보였다. 큰 아들 내외가 시장통에서 억척스럽게 일하고 할머니가 분주히 살림을 돌보는 동안, 이렇다 할 역할이 없던 할아버지는 마당 화단에 물을 주는 것으로 소일하며 지냈다.
여름이었다. 할아버지는 외출할 때면 가끔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모시 적삼을 꺼내 입었다. 살이 비칠 듯 얇고 고운 모시옷은 칠이 벗겨진 양옥집이나 땀 냄새나는 시장통 풍경과는 도무지 섞이지 않았다. 챙 넓은 밀짚 중절모까지 눌러쓴 모습은 영락없는 개화기 한량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꼿꼿한 옷깃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고집과 그 뒤에 숨겨진 쓸쓸함이 어린 마음에도 묘한 이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시 적삼이 실은 무너져가는 자존심을 붙들기 위한 마지막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고향 땅을 할아버지는 다 탕진했다고 했다. 장날에 나가 산자락의 금쪽같은 논밭을 술과 바꿔 드셨다는 믿기 힘든 일화는 친척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모시 적삼 차림으로 자식들이 일하는 감전동 새벽시장이며 덕포시장을 뒷짐 지고 휘돌던 할아버지의 걸음은, 어쩌면 다 잃고 남은 마지막 자리를 확인하려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장통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돌아오는 날, 할아버지의 입가에 맴돌던 콧노래는 늘 반 박자씩 맥이 빠져 있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집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아버지 형제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취기는 결국 궁핍한 현실의 원인인 아비를 향한 원망으로 번졌다. 술버릇은 유전이었다. 붉어진 얼굴로 고성을 지르는 아들들의 주정은 젊은 날의 할아버지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고향에서 '있는 집' 자식으로 살던 시절의 설움이 술 냄새와 섞여 담장을 넘었다.
부엌에서 행주를 내동댕이치는 할머니의 역정은 단순한 타박이 아니었다. 평생을 술과 한량 노릇으로 속을 태운 남편, 그리고 그를 닮아 똑같이 비틀거리는 자식들을 지켜봐야 하는 여인의 탄식이었다.
나는 소란을 피해 미리 할아버지 방으로 가 있곤 했다. 문 너머로 자식들의 원망 섞인 주정이 쏟아질 때, 할아버지를 보았다. 자식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를 갈고 있었다.
"빠드득... 빠드득..."
그는 어금니가 으스러져라 이를 갈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자식들에 대한 분노라 여겼다. 하지만 쉰다섯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던 것 같다. 가산을 탕진해 자식들을 고생시킨다는 부채감, 그 못난 술버릇마저 닮아버린 아들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자괴감. 할아버지가 작은 방에서 갈아대던 것은 이가 아니라 삭히지 못한 회한이었으리라.
할아버지에게 화단은 특별했다. 고향의 드넓은 땅 대신 허락된 유일한 영토, 두 평 남짓한 흙바닥. 그는 붉은 장미를 가꾸고 이름 모를 화초의 잎을 닦으며 소일했다. 흙냄새를 맡는 순간만큼은 무력한 노인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통제하는 온전한 주인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건 예순의 문턱이었다. 평생을 태운 담배 연기가 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기세 좋던 모시 적삼도, 화초를 가꾸던 손길도 병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할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얘기를 듣고 부모님과 감전동에 갔었다. 병석의 할아버지는 시계 하나를 꺼냈다. '라도(Rado)'. 묵직한 메탈 밴드의 시계였다. 당신 생에 유일하게 남은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떨리는 손이 내 손을 찾았다.
"이거 니가 하거라. 좋은 기다."
어린 손목에 얹힌 시계는 터무니없이 크고 무거웠다. 투박한 메탈의 차가운 금속성이 피부에 닿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은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다. 끝내 놓지 못했던 가장의 권위이자 내게 물려주는 당신의 굴곡진 시간이었다.
장례는 감전동 큰집 안방에서 치러졌다. 삼베 상복을 입은 아버지 형제들이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조객을 맞았다. 좁은 집안을 가득 메운 곡소리와 향 냄새, 그 빽빽한 공기에 숨이 막혀 마당과 옥상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러다 문득 내려다본 손목이 낯설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라도 시계의 유리가 깨져나가고 없었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파편 하나 남지 않은 채 텅 빈 다이얼만 드러나 있었다. 마치 주인을 따라 숨을 거둔 듯했다. 시계는 그렇게 보호막을 잃은 알몸으로 멈춰 서 있었다.
사십여 년이 흘렀다. 유리가 깨진 시계는 서랍 속을 뒹굴다 사라졌지만, 시간은 흘러 나를 그 시절 할아버지의 나이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다. 탕진할 땅은 없지만 술에 취해 자식들에게 주정을 부리지도 않는다. 겉보기에 나는 할아버지보다 훨씬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퇴근길,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내 얼굴에서 문득 할아버지를 만난다. 의연한 척하지만 불확실한 노후와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속으로 끙끙 앓는 내 모습에서, 소주 한 잔의 위로가 간절해지는 저녁, 혹은 텔레비전 소리에 묻혀 멍하니 앉아 있을 때의 그 서늘한 고독감에서도.
깨진 라도 시계는 이제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견뎠던 시간의 무게는 내 몸 어딘가에 남아 흐른다. 유리가 깨져도 태엽이 감기듯 삶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