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처사, 사무관
내 이름 뒤에 붙은 '직무대리'라는 네 글자는 할인 상품의 가격표 같았다. 2022년 1월, 시청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튕겨 나와 구청 과장석에 앉았을 때, 나는 아직 '완전한' 무엇이 아니었다. 모니터 속 결재 버튼을 누를 때마다 마우스 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겉돌았다. 등 뒤 창문으로 스며드는 한기는 계절 탓만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과장님" 하고 부를 때마다 그 소리는 허공에서 반 박자 늦게 내 귀에 닿았다. 그 3주간, 나는 의자 위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 있었다.
6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받아 든 임용장은 그 부유감을 단숨에 눌러버릴 만큼 묵직했다. 빳빳한 용지에 박힌 내 이름 석 자. 과거 대통령 명의로 내려오던 봉황 문양은 지방자치제와 함께 사라졌지만, 종이의 무게만큼은 지난 29년의 세월을 합친 것보다 무거웠다. 3월의 봄바람 속에서, 나는 비로소 관(官)의 안쪽, 그 단단한 성벽 내부로 진입했다.
배정받은 다섯 평 남짓한 공간. 턱 밑까지 올라온 파티션은 바깥의 민원 소음과 전화 벨소리, 직원들의 분주한 풍경을 잘라냈다. 타인의 외투와 섞일 일 없는 단독 옷장, 내 몫으로 배정된 완벽한 정적(靜寂). 그 고요함이 승진의 대가였다. '건강증진과장 OOO'. 책상 위 명패를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액정 속에서 빛나는 그 이름은 29년 전, 9급 서기보 시절 민원대의 고성에 묻혀 흔적조차 없던 내 이름과 같은 활자였으나 질감은 전혀 달랐다. 보고를 하러 온 젊은 직원이 파티션 입구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숨을 죽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벽' 안쪽의 사람이 되었음을, 누군가에게 긴장을 주는 존재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사무관이 되기까지 꼬박 29년이 걸렸다. 고시 출신들이 20대 초반에 시작하는 그 지점이, 누군가에게는 머리에 서리가 내려야 비로소 허락되는 생의 마지막 천장이 된다. 특히 행정직에 비해 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기술직에게 사무관 승진은 분명 좁은 문이다. 월급 명세서의 앞자리가 바뀌었지만, 덩달아 불어난 세금과 기여금을 제하면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그러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다. 훗날 위패를 쓸 때 '현고학생부군신위'가 아닌 '현고사무관부군신위'라 쓸 수 있다는 것. 족보에, 그리고 자식들의 기억 속에 '관(官)' 자 하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 9급 말단 시절, 술 취한 민원인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했던 비굴함과 울분이 그 세 글자 속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 지난한 밥벌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상이었다.
퇴근길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평소라면 가격표를 보고 혀를 찼을 고가의 가방을 사고, 몸에 딱 맞는 고급 양복도 한 벌 샀다. 30년 가까이 조직의 부속품으로 닳아버린 나에게 건네는 전리품이었다.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죽어서 비석에 새길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특권"이라는 말을 곱씹다 보니, 불현듯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잠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묘비에는 '처사(處士) 영해 박공 00 지묘'가 새겨져 있다. 벼슬 한 적 없는 이의 비석에 으레 적히는 '학생(學生)' 대신, 할아버지는 '처사'라는 호칭을 받으셨다. 처사란 본래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은 선비를 이르나, 장례에서는 관직 없이도 그 인품이 남달라 '학생'이라 낮춰 부르기 송구한 이를 기리는 최상의 예우다. 40여 년 전, 할아버지의 부고를 전할 때 친지들은 가장 먼저 고향 마을 문중 어르신들을 찾아갔다. "처사라는 호칭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유족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허락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다행히 어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공무원은 아니었으나 마을 이장을 맡아 궂은일을 도맡았고, 겨울이면 군청 산림계 비정규직으로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무단 벌목을 막아냈던 그 거친 손을 마을은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묘비명의 '처사'는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그가 땀 흘려 지켜낸 이웃들의 마음이 수여한 벼슬이었다.
구청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시청으로 복귀한 지금, 나는 파티션 너머 동료들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뒤섞인 공간에 앉아 있다. 독립된 사무공간도, 넓은 회의용 탁자도 사라졌다. 화면 속 전자문서에 결재를 하다 보니 양산 솥발산 언덕의 할아버지 비석과, 언젠가 내 이름 위에 새겨질 관직명이 나란히 떠오른다. 이웃의 합의로 얻어낸 '처사' 두 글자와, 국가 시스템이 허락한 '사무관'일지 혹은 '서기관'일지 모를 세 글자.
어느 쪽이 더 명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모니터 속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에게 묻지만,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훗날 내 묘비에 남을 그 직함은, 지난 세월의 풍파를 누구의 배경도 없이 오롯이 내 힘으로 건너온 '삶의 증명'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