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에 실려 온 삶들
올해 들어 달게 잤다 싶은 날을 손에 꼽는다. 저녁 열 시도 되기전, 조금은 이르다 싶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끌어당긴다. 스르르 의식이 끊기는가 싶더니, 눈을 뜨면 어김없이 새벽 한두 시다.
천장은 캄캄하고 정신은 오히려 맑아진다. 뒤척이다 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꺼진 모니터를 한참 응시하다가 책꽂이에 묵혀둔 책을 빼어 무심히 뒤적여본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다시 졸음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우두커니 앉아 뜬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어둠을 멍하니 견디느니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낫다.
간단히 씻고 집을 나선다. 1층 공동 현관문을 나서자 한겨울의 예리한 냉기가 뺨을 때린다. 유난히 끈질긴 추위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걷는다.
지어진 지 사반세기가 지난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숲처럼 고요하다. 산책로 가로등을 따라 도열한 아름드리나무들은 낮의 소란함을 모두 지우고 검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가지마다 겨울바람이 스치는 소리, 단지 밖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텅 빈 광장을 가로지르며 걷노라면 얕은 잠에 시달려 몽롱했던 머릿속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내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지하 공간 특유의 건조한 공기와 형광등 불빛이 낯설게 다가온다. 환풍기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만이 빈 통로를 채우고 있다. 아직 도시가 본격적으로 깨어나기 전인 5시 무렵, 그러나 플랫폼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서 있다.
벽에 기대 눈을 감은 사람, 멍하니 스크린도어를 응시하는 사람.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간간이 누군가의 마른기침이 타일 벽에 부딪혀 짧게 울리고, 다시 졸음과 피로가 섞인 정적이 내려앉는다.
멀리서 쇠가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문이 열리는 순간, 훅 끼쳐오는 것은 훈훈하면서도 텁텁한 공기, 그리고 사람의 냄새다. 첫차는 예상과 달리 빈 좌석이 없다. 시발역에서부터 차곡차곡 실어 온 삶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나는 객차 끝, 휠체어를 위해 비워둔 공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차가운 벽면에 등을 기댄 채 묵묵히 서 있는 몇몇 사람들 곁에 조용히 섞여 어깨를 기댄다.
서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자연스레 닿는 곳은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릎과 발치다. 유독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눈에 띈다. 두툼한 패딩 점퍼에 넥워머로 얼굴 반쪽을 가린 모습이다. 발목에는 어김없이 투박한 안전화가 신겨 있고, 바짓단에는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다. 한 사내는 묵직하게 처진 백팩을 무릎 위에 얹고 거친 손마디로 팔짱을 낀 채 턱이 가슴까지 내려앉아 있다.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고개가 꺾였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그 사내의 발 옆으로 낡은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 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두툼한 털모자를 눌러 쓴 채,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비닐 장바구니 손잡이를 손목에 걸어둔 게 보인다. 잠이 든 건지 깨어 있는 건지,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다. 맞은편에는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하고 무거운 백팩을 짊어진 또 다른 여성이 구부정한 자세로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있다.
나와 비슷한 차림새의 사람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다. 내 옆에 선 남자는 코트 깃을 세운 채 이어폰을 꽂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맞은편 좌석 끝에서는 젊은 여자가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쥔 폰이 무릎 위로 미끄러지는 줄도 모른다. 선잠을 깬 사람, 붐비는 출근길을 피하려 일찍 나선 사람, 저마다의 사정으로 이 시간 이 칸에 실려 있다.
작업복의 사내도, 비닐 장바구니의 여인도, 코트 깃을 세운 남자도 모두 말없이 눈을 감고 있다. 이 어둠 속을 뚫고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흙먼지 날리는 건축 현장일까, 아직 불 켜지지 않은 빌딩의 긴 복도일까, 적막한 사무실의 모니터 앞일까. 열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몸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기울고, 안내 방송의 울림이 짧게 퍼졌다 사라진다.
연산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나오니 여전히 밖은 어둠이다. 시청까지는 걸어서 10분. 찬 바람을 맞으며 걷는 동안 몸에 열기가 돌고 정신이 맑아진다. 걸음마다 아까 지하철에서 마주친 흙 묻은 안전화와 낡은 운동화가 자꾸만 밟힌다. 지금쯤 그들도 각자의 일터에 도착해 옷깃을 여미고 있을 것이다.
시청 14층, 사무실은 벌써부터 훤하다. 내가 타고 온 열차보다 더 이른 첫차로 출근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청소기를 돌리고 전날 채워진 쓰레기통을 비우는 중이다. 아직 난방이 가동되지 않아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복도에서, 정수기 온수를 받아 믹스커피 한 잔을 타 들고 창가에 선다.
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