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성취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착각
부산 시청 광장을 가로지르는 1월의 바람이 매섭다. 부산의 겨울이란 으레 사나흘 바짝 춥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풀리기 마련인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열흘 이상 동장군이 기세를 꺾지 않는다. 열이 많다며 한겨울에도 실내에서는 반팔 티셔츠 차림이던 직원마저 패딩점퍼를 껴입는 것을 보면, 이번 추위가 예사롭지 않긴 한 모양이다.
요즘 점심시간, 대화는 으레 입시 이야기로 흘러가곤 한다. 사무실마다 입시생 자녀를 둔 이들이 몇 명은 있기 마련이라 피하기 어려운 화제다. 어느 해가 되었건 희비는 엇갈린다. 누군가는 들뜬 목소리로 합격의 낭보를 전하고, 누군가는 애타게 예비 번호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하지만 축하 인사가 오가고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묘한 공허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자식의 합격은 엄연한 자식의 몫일 뿐 결코 부모의 훈장이 될 수 없으며, 잠시 빌려온 환호가 걷힌 뒤엔 정작 '나'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탓이다.
얼마 전, 교육청 주관으로 열린 '학생 마음건강 관련 회의'에서의 일이다. 시청 정신건강팀장 자격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한 위원이 나의 옆자리에 앉은 의대 교수에게 은밀히 말을 건넸다. "교수님, 이번에 제 아들이 교수님 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교수님 밑에서 수련받게 되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엄숙해야 할 회의장이었지만, 자식 자랑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아들이 얼마나 고생해서 의대에 갔는지 무용담처럼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교수는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위원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자식의 인생을 마치 자기 생의 확장판으로 여기며, 아이의 성공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낯익은 초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난 33년 공직 생활 동안 스쳐 간 수많은 '잘난 자식'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고시 합격, 대기업 입사, 전문직 취업…. 그러나 그 화려한 서사의 끝은 대개 비슷했다. 자식이 비상할수록 부모는 둥지의 주변부로 밀려나곤 했다. "잘난 자식은 국가의 자식이고, 돈 잘 버는 자식은 사돈의 자식이며, 못난 자식만이 내 자식"이라는 세간의 우스갯소리는 서글픈 진실을 품고 있다. 의대 간 아들을 자랑하던 그 위원 또한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들은 결국 사돈집의 귀한 사위가 되어, 명절에나 잠시 얼굴을 비치는 '반가운 손님'으로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고요히 받아들이려 한다. 자식도 결국은 남이다. 물론 이 말은 천륜을 끊으라는 비정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자식이 힘겨울 때 뼈가 저리도록 걱정하고 기도해 줄 수는 있지만, 결코 대신해 아파줄 수는 없다. 내 마음이 자식의 마음과 온전히 포개질 수 없다는 이 서글픈 한계를 긍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 다른 우주를 가진 존중받는 타인이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식은 부모라는 활을 떠난 화살이다. 부모의 역할은 화살이 과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도록 견고하게 시위를 당겨주는 것까지다. 날아가는 화살을 붙잡으려 하거나, 화살에 매달려 함께 날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시청사를 나서자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오늘은 시청에서 연산역을 지나 거제역까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퇴근하기로 한다.
혼자 걷는 발걸음이 이토록 가볍다. 생각해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다. 나란히 걷되, 서로에게 기대어 비틀거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숨통이 트인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설 때, 자식 또한 부모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전히 제 속도대로 걸어갈 수 있다.
거제역에 다다를 즈음, 살을 엘 듯하던 바람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진다. 낮 동안 회의실을 채웠던 그 아버지의 자랑도, 자식의 성공을 내 훈장인 양 여기던 예전 나의 착각도 이 차가운 공기 속에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나는 더 이상 자식이라는 타인에게서 내 삶의 정답을 구하지 않기로 한다. 진정한 어른의 사랑이란, 품 안의 자식을 기꺼이 놓아주고 그 빈자리를 오롯이 나 자신의 단단한 고독으로 채우는 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