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그대에게

선배가 전하는 응원의 한마디

by 박계장

보건직 공무원은 늘 시민의 곁,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일한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일상이 멈추지 않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식품과 공중위생, 감염병 대응, 병의원과 약국의 인허가, 정신건강과 건강증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할 수 없는 일들이다.


나 역시 그 일을 서른세 해째 하고 있다.


스물두 살의 봄, 서면 대로변에 있는 '취업정보은행'이라는 공무원 수험서 판매점에서 나는 한 장의 채용공고를 만났다. '부산시 지방 보건직 공무원 채용시험 예정' 자격증이 없어도 응시 가능하다는 문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달. 처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붙들었다. 운도 따랐고, 나는 그 기회를 망설임 없이 잡았다.


1993년 3월, 공직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수많은 계절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며칠 전, 보건직 공무원 정기총회가 열렸다. 426명 중 약 200명이 행사장에 모였다.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 건강 문제, 번아웃… 120명이 넘는 이들이 휴직 중이었고, 여러 이유로 불참한 이들도 많았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올해 새롭게 입직한 신입 직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마흔 명이 넘는 청춘들. 그중 남성은 네 명뿐이었다. 여전히 성비의 불균형은 현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오래전의 내가 떠올랐다. 어색한 정장을 입고, 떨리는 손끝으로 서 있었던 그날의 나. 막연한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말끝을 더듬던 모습. 그날의 감정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중 한 명에게 격려금이 전달되었고, 대표로 인사말을 부탁받은 그는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 마디 말을 툭툭 내뱉더니 "이만 하겠습니다" 하고는 서둘러 내려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짠하던지. 우리는 초등학교 학예회에 온 학부모처럼 박수를 보냈고, 어색하고도 풋풋한 그 순간은 아마 어떤 연설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얼마 전엔 공무원노조위원장 선거 공약 중에 이런 항목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를 시키는 행위를 신고받겠다' 그걸 보고는 '이건 또 무슨 세상인가' 싶어 실소를 터뜨린 기억이 있다.


어쩌면 오늘 마이크를 넘겨받은 신입 직원의 마음도 그랬을지 모른다. "이건 신고감이다!" 싶은 순간이었겠지.


하지만 괜찮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중 누구도 부담을 주고 싶어 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귀엽고 애틋할 뿐이었다. 말이 꼬여도, 얼굴이 붉어져도, 침묵이 흘러도 상관없다. 그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선 당신은 우리 모두의 과거였고, 앞으로 우리가 지켜주고 싶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수없이 실수를 반복했고, 무엇이 옳은지 몰라 밤을 지새운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말없이 도와주고, 등을 토닥여준 그 손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지금 보건직렬은 적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여성이 대부분인 조직 구조에서, 단속과 현장 대응 업무는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유흥업소, 노래방, 숙박업소, 노점... 민감한 업종에 대한 지도점검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이다. 그러나 현장에 나선 여성 공무원들은 언어적 위협과 감정노동, 때로는 성적 불쾌감을 견뎌야 한다.


야간 단속이나 취객 상대 업무는 신변의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휴직을 선택하고, 남은 사람들은 더 많은 부담을 짊어진다.


업무는 몇몇 사람에게 고정되다시피 하고, 남성 직원들은 단속 업무에 자주 투입된다. 이런 구조는 결국 조직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이제는, 누가 잠시 비워도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성별과 상관없이 누구나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과중하지 않은 업무 배분, 탄탄한 조직 구조, 그리고 상호 존중의 문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햇살처럼 투명한 얼굴들이 웃고 있었다. 그 속엔 세상의 무게를 아직 모르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전하고 싶었다. 이 말 한마디를.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우리는 네 곁에 있어."


선배란 앞서 걷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넘어졌던 기억을 품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받은 따뜻한 손길을 이제는 내가 내어줄 차례다.


좋은 선배가 있고, 성실한 후배가 있으며, 함께 성장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 조직은 사람 냄새를 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조직이 시민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이제 몇 해 남지 않은 시간을 앞에 두고 나는 무엇을 남기기보다 다음 사람들을 믿는 쪽을 택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서로를 아끼고, 실수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공직문화가 조금씩이라도 만들어지기를.


어제 무대에 섰던 그 청춘들이 내가 다 닿지 못할 길의 어느 지점쯤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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