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였다. 월요일, 우리는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나 ‘일탈’이라 이름 붙인 하루를 우리에게 선물 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완주의 지방자치인재개발원에서 장기교육을 함께 이수했다. 각기 다른 부서와 구청에서 일하던 우리는 그 시기만큼은 한 강의실에 모여 강사의 강의를 함께 듣고,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며, 업무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끝난 뒤, 새롭게 배치된 부서에서 일하며 가끔 이른 아침에 커피를 같이 마시고, 저녁에는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다들 "이제는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 우리는 함께 달려온 나날에 대한 보상처럼, 하루를 내어 걷기로 했다. 부산에 살면서도 정작 부산을 모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외지에서 온 관광객처럼 우리의 부산을 돌아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부전역에서 출발하는 동해남부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네 명이 그곳에서 탑승했고, 거제역에서 두 명이 합류했다. 밤새 내린 비로 공기는 씻긴 듯 맑았고, 황사는 어디론가 밀려가 버렸다. 송정역에 도착하자, 정돈된 관광지의 모습이 우리를 반겼다. 낯익은 곳이었지만, 오늘은 낯선 기대를 품고 있었다.
송정해수욕장에는 서퍼들이 파도를 가르며 여름을 먼저 맞이하고 있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들의 모습은 직장인의 일상과 닮아 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해변 끝자락의 죽도 언덕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지난 기억들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길 끝에 있는 '문토스트'. 올때 마다 긴줄로 인해 포기했지만 오늘은 운이 따랐다. 개점 전이었음에도 사장님은 “손님을 헛걸음 하게 할 수 없지”라며 이른 영업을 허락해 주셨다. 토스트 한 입에 따뜻한 마음이 배어 있었다. 흔한 재료이되 흔하지 않은 내공. 많은 이들이 그 맛을 기억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점심은 송정집에서 해결했다. 묽은 김치찌개 국수, 만두와 충무김밥 스타일의 소박한 한 상. 맛에 감탄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 맛이 왠지 너무 익숙해서 고개가 갸우뚱 해졌다. 여행이란, 반드시 감동일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폐선 부지를 따라 조성된 갈맷길을 따라 우리는 해운대까지 걸었다. 경치가 좋은 곳이 나타나면 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고,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두어 시간을 여유롭게 걸었다.
해운대시장 골목의 상국이네 떡볶이에 들렀다. 단맛이 강하고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어릴 적 분식집의 향수가 되살아났다. 순대의 오래된 맛이 반가웠다.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든 이도, 그냥 비를 맞으며 걷는 이도 있었다.
발걸음은 해리단길까지 이어졌다.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몇 해 전 느꼈던 그 생동감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물론 평일 오후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일행들의 생각은 대체로 같았다. “예전만 못하네”, “어딘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라는 말들이 조심스럽게 오갔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골목은 이젠 한산했고, 그 많던 청년 창업 가게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춘 듯했다.
비단 해리단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망미단길 역시 한때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그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다. SNS를 타고 빠르게 알려졌던 골목들은, 어느새 높은 임대료만 남기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던 가게들과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골목마다 붙은 멋진 이름들이 상권을 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정작 그 동네만의 고유한 분위기와 이야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감성을 앞세운 소비는 빠르게 번지지만, 그 감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와 정책, 그리고 공공의 관심은 늘 한 발 늦다.
우리의 하루는 수영구 팔도시장의 해동국밥에서 마무리되었다. 많이 걸은 탓에 지하철로 이동했고, 꽃살 삼겹살의 고소한 풍미와 정육업체와의 인연 덕에 가능한 합리적인 가격, 그리고 소주 한 잔이 더해져 오랜만에 느긋하게 흘러가는 저녁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이런 시간,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직생활이란 늘 바쁜 것 같지만, 바쁜 척하며 스스로를 몰아세운 날들도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 없이 달려온 길.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을 시간이다.
함께한 이들도 하나둘 퇴직을 앞두고 있다. 누군가는 마지막이 될 직책을 맡고 있고, 누군가는 남은 시간을 정리 중이다. 나 역시, 이 긴 여정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중이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 시계는 오후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직장인들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듯, 우리도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봄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촉촉이 젖은 거리 위로, 오늘 하루의 풍경이 조용히 흘러갔다.
그 빗방울 너머로,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하루가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이제는, 잠시 쉬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충분히 잘 걸어왔으니까.
앞으로 남은 길은,
조금 더 나 다운 걸음으로, 조금 더 여유롭게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