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한그릇

by 박계장

오랜만에 후배와 수구레 국밥을 먹었다. 한동안 이 국밥집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5급으로 승진한 뒤 구청에서의 2년, 장기 교육 1년을 거쳐 다시 시청으로 복귀하기까지, 바쁘게 흘러간 시간들 속에서 이 집의 존재도 희미해졌던 모양이다.


거제시장은 시청 직원들에게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할 수 있는 '심정적 마지노선'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마지노선에서조차 한참이나 올라가야 닿는 이 수구레 국밥집은, 웬만한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발길을 옮기기 어려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 동선과 맛, 비용과 소요 시간을 재빠르게 계산해야 하는 작은 전술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국밥집을 찾은 오늘은,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난 짧은 모험이자, 한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을 꺼내는 특별한 한 끼였다. 그 특별함은 익숙한 길을 벗어나 느껴지는 작은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시청 인근의 음식점에 대해선 주민들보다 더 많이 알던 선배의 추천으로 처음 알게 된 집이다. 선배와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그곳에서 가졌던 기억이 선명하다. 국물은 깊고 진했으며, 함께 내어 주는 계란부침은 대파도 넣지 않고 계란만 풀어 투박하게 부쳐냈다. 김치와 백반집에서 흔히 나오는 반찬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그 단출함이 오히려 정겨웠고, 이후로 나는 그 집을 자주 찾게 되었다.


그러다 시청을 떠난 뒤 몇 해가 흐르며, 그 집도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오늘 후배가 며칠 전부터 수구레 국밥이 먹고 싶었다며 점심식사 장소로 그 집을 정했다. 후배의 말에, 예전에 자주 들렀던 그 공간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구레는 세월의 주름처럼 자글자글한 결을 품고 있다. 송골송골 떠오르는 기름방울 사이로 깊은 향이 번진다. 식감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쫄깃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국물은 탁하지도, 맑지도 않은 중간의 농도로 입안을 편안하게 감싼다. 콩나물이 듬뿍 들어 있어 씹는 맛도 그만이다. 한 수저를 뜰 때마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위안이 느껴진다.


국밥을 마주하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바쁜 일과가 끝이 나면 둘러앉아 국밥 한 그릇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의 모습이 그렇다. 한 숟갈 국물을 떠넣고, 쫄깃한 수구레를 씹으며 소주 한잔을 들이켰던 순간들, 그때 주고받은 대화와 눈빛은 흐릿해질 줄 몰랐다. 낡은 테이블, 스테인리스 수저, 투박한 반찬 그릇들까지도 그 시절을 선명하게 불러낸다. 식당의 모든 사물이 마치 시간을 담은 매개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그 자리에 후배가 앉아 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그 자리를 비우게 될 자신을 생각하며 국밥을 뜨는 손이 멈칫한다. 하지만 그 따뜻한 시간들이 국밥의 온기 속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에서 나눈 정과 말들이 어떻게든 이곳에 스며들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산화가 막 시작되던 시절, 전산망 게시판에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구청 직원들에게 남기던 시청 선배가 있었다. 호는 '반송거사'였다. 반송동에 산다고 그렇게 지었다는 그 선배의 글에는 시조 한 수와 고사성어, 삶의 여백이 배어 있었다. 한 장의 짧은 글이었지만, 그 속엔 하루를 기록하고, 사람을 생각하고, 삶을 바라보는 정직한 태도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시청은 참 여유가 있구나" 하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그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단상은 한가한 이의 취미가 아니라 한 시대의 기록이었다. 빠듯한 하루 속에서 마음의 틈을 만들 줄 알았던 사람, 정해진 일 외의 '쓸데없음'을 통해 사람의 기운을 전하려 했던 선배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이 이제는 더 귀하게 느껴진다. 바쁨을 핑계로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공직 생활이 끝자락에 다다랐다. 수많은 공문과 민원, 사람들과의 일이 지나갔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함께한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다. 국밥집에서 나눈 한 끼가 회의실보다 많은 문제를 풀어냈고, 소주 한 잔이 긴 설명보다 더 깊은 이해를 만들어냈다. 공직의 본질이란 어쩌면 그런 장면들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서가 아닌 눈빛으로, 결재가 아닌 동행으로 공직의 의미를 배웠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따뜻한 국밥이 남긴 여운을 안은 채, 잔잔한 바람 속에서 아이스커피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국밥은 단지 음식이 아니다. 시간의 맛이고, 관계의 맛이다. 나눈 숟가락과 눈빛, 그리고 다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한 그릇에 담겨 있다. 그 깊이는 어떤 고급 요리도 따라올 수 없는 특별함을 지닌다.


내가 떠난 뒤에도, 이 국밥집에서 나눈 정서가 후배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그에게도 이 한 끼의 온기가 삶의 힘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그도 또 다른 후배와 이곳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수구레 국밥처럼, 깊고 오래 남는 맛이 있다. 그 맛을 기억하는 나도, 제법 잘 살아온 삶이었나 보다. 한 그릇 국밥에 담긴 시간과 기억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향기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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