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 너머의 얼굴들

다시 살아갈 이유

by 박계장

통계 속에 숨겨진 이름들이 있다. 연간 천 명. 부산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숫자다. 차가운 데이터 뒤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얼굴들이 있다.


바늘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벽시계를 보면서 생각한다. 하루를 채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계 바늘처럼, 우리의 삶도 반복되는 듯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날이 마지막 순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이 사업이 효과가 있긴 한 건가요?"


동네의원 마음건강돌봄 연계 사업 협의체 회의가 끝난 후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 던진 이 질문에 한동안 생각이 머물렀다.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을 들이는 이 사업이 실제로 무엇을 바꾸고 있는지, 모두에게 의문이었다.


그때 다른 참석자가 말했다.


"몇 명만 마음을 바꿔도 자살률은 달라집니다. 그게 이 사업이 가진 의미입니다."


단 한 마디가 내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단순히 통계를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을 붙잡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동네의원 마음건강돌봄 연계 사업'은 현재 부산에서만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신과가 아닌 내과, 외과 등 1차 의료기관에서 정신건강에 취약한 주민을 일찍 발견하고, 필요한 경우 정신의료기관으로 연계하거나 정신건강복지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체계다. 정신과적 문제를 인정하지 않거나 정신의료기관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동네의원 의료진이 건네는 말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문을 열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출발한 사업이다.


회의에 참석한 정신과 전문의이자 대학교수는 "자살의 원인은 모호하다"고 했다.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고,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이 갑작스레 삶을 멈추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보던 밤, 지인들과 웃던 하루를 마친 후 조용히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그래서 자살의 원인을 단정짓거나, 어떤 조치를 취하면 반드시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시도별 자살률 통계를 보면 전국 평균 상승폭보다 부산지역은 더 완만한 증가세를 보인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부산시 고유의 '동네의원 마음돌봄연계 사업'이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현재 240개 동네의원이 이 사업에 참여하고, 연간 3,409명이 동네의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숫자 너머에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실제 사람들이 있다. 상담을 받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었기를, 그들의 삶에 작은 빛이라도 되었기를 바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이 기초연금 도입 이후 뚜렷하게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2011년 인구 10만 명당 79.7명이던 수치가 2022년에는 42.1명으로 낮아졌다.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노인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 늘어난 시기와 맞물린다.


모든 연령대를 살펴보면, 20대는 22.2명, 70대는 39명, 80대는 59.4명의 자살률을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가장 오래 버텨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만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망, 지역사회의 관심, 의미 있는 활동의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존중받는 느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삶은 더 살만한 것이 된다.


동네의원 돌봄 사업은 시범사업일 뿐이지만, 국비 지원이 없어도 2026년까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 작은 연결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어갈 이유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20대의 자살이 큰 충격과 관심을 받지만, 통계는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모든 세대의 고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생의 어느 단계든,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문을 닫기 전에, 그 문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그 너머에도 누군가 기다리고 있음을 전하는, 그런 사회 안전망이 필요하다.


살고 싶은 마음이 다시 움트도록 누군가의 눈빛이, 말 한마디가, 그날의 온기가 되어주기를. 그래서 오늘 하루가, 그 어떤 사람의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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