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진다는 말

by 박계장

자살을 결심했던 이가 있었다. 날짜까지 정해놓고 모든 것을 정리한 뒤,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그날, 며칠간 굶어 허기진 그의 눈에 라면 한 봉지가 들어왔다. 사천짜파게티였다. 어쩌면 마지막 식사가 될 그 라면을 끓였다.


첫 한 입을 삼키는 순간, 예상과 다른 맛이 입안에 번졌다. 짜장의 익숙함 너머로 묘한 매운맛이 스쳤다. 혀끝을 간질이는 낯선 풍미가 마지막 장면으로 예정되었던 하루를 흔들었다.


‘이 라면 맛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만 살아보자.’


그것은 거창한 이유도, 숭고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한 그릇 라면이 선사한 뜻밖의 맛이었다. 혀끝에서 살아난 감각 하나가 죽음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해졌고, 또 하루가 쌓였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요즘, 자꾸만 들려온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젊은 경찰관, 복직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구청 직원, 경제적인 어려움에 삶을 등진 옛 동료까지. 그들의 부재가 뉴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이내 사라진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죽을 용기로 왜 살지 않느냐고.
그렇게 힘들면 일을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가난이 힘들면 파산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고,
가정사가 괴로우면 잠시 거리를 두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삶이 그렇게 단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살은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살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선택된다. 생각은 좁은 터널로 수렴되고, 감정은 단단한 돌덩이처럼 한 곳에 굳어버린다. 위로의 말도, 따스한 손길도, 출구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보이지 않게 된다. 오직 “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결론 하나만 남는다.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속 장면이 떠오른다. 어린 자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툭 내뱉듯 말했다.


“살면, 살아진다.”


그 말은 억지 위로나 대단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고통을 삼키며 살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다. 살아보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하루하루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살아져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더 사는 이유가 한 그릇의 라면일 수 있다. 살아 있어야 아침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느낄 수 있고, 출근길에 스쳐가는 꽃향기나 저녁 무렵 마주치는 낯선 이의 미소를 알아챌 수 있다.


그런 감각들은 작지만 분명하게 삶을 실감하게 해준다. 오늘 하루를 간신히 넘긴 사람이 내일도 무사히 하루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어느 날 다시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살면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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