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 교양 수업을 들어본 대학생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에 대해 보고서라도 한 편 쓰고 나면, 존재도 모르고 살아오던 그가 친숙하게 느껴지곤 한다. 나에게는 아니 에르노가 그런 존재였다. 동시대의 세계문학을 배우는 전공 수업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기말고사를 대신해 모두의 앞에서 발표해야 했다. 프랑스 문학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어 잔뜩 겁먹으며 읽어갔지만, 머나먼 나라의 부녀 이야기에서 지극히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번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그 아니 에르노라고 한다. 내가 읽은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이었지만, 오래 못 본 지인이 경사를 맞은 것처럼 뿌듯했다. 수상 사실을 몰랐을 때는 갑자기 교보문고를 가득 채운 익숙한 그의 이름이 반가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비교적 생소한 프랑스 문학에다가 기욤 뮈소 같은 대중적인 인기작가도 아닌데...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씁쓸했다. 몇 년 전까지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때마다 지금은 범죄자로 밝혀진 어느 시인의 집 앞에서 장사진을 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평소에는 문학을 도외시하면서 세계적인 상이라는 타이틀에만 집착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서점가의 아니 에르노 열풍도 권위의 우상에 취약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내가 분석했던 텍스트는 <남자의 자리>였다. 번역된 제목보다는 La Place라는 원제를 더욱 좋아한다. 남자(아버지)의 자리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나'(딸)의 자리가 이동함으로써 보이는 차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딸이 공부를 통해 소위 상류층이 된 후 그렇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솔직하게 서술한다.
딸이 서 있는 자리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딸이 장례식에서 마주한 ‘발가벗은 아버지’는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상징적으로도 알몸이다.
“난 처음으로 아버지의 성기를 보았다. 어머니는 재빨리 그것을 깨끗한 셔츠 자락으로 가리고는, 살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형편없는 것 좀 가려요, 이 불쌍한 양반아.’”(11)
드러난 성기는 아버지의 권위와 가부장제의 해체를 알리는 상징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가장이라는 신성에서 날것의 대상으로 변모하는 일종의 성인식이며, 부모님과 함께 남겨둔 떠나온 세계와의 영원한 작별이기도 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일등칸의 질서에 맞추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도 이제는 정말 부르주아 여자가 다 되었군"(20)이라는 말로 부르주아가 아니었던 과거의 자신과 그 세계에 속해있던 아버지를 함께 호명한다.
아버지가 서 있는 자리
딸이 바라본 아버지의 두려움은 "Deplace"로 요약된다. 아버지는 노동자에서 자영업자로 올라온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노동자 계급으로 다시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대출받아 가게를 산 것이 단적인 예시다.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강박관념: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이웃, 고객, 모든 사람)"(64)이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손님들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감추려 소극적으로 처신한다. 이등칸 표를 가지고 실수로 일등칸에 타거나, 맞춤법을 몰라 공증 서류를 잘 못 표기한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두려움(deplace)"에서 소산했다고 '나'는 분석한다.
교육을 통해 부르주아가 된 딸에게 아버지는 자신보다 ‘하찮은’ 사람이 된다. "아버지는 단순하거나 하찮은 사람들의 범주, 혹은 순박한 사람들의 범주로 분류됐다"(88) 딸은 아비투스를 기반으로 아버지를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한다. ‘나’와 아버지가 대립하는 가장 큰 이유도 아비투스의 문제이다. 그들의 언어가 달라지자 사회적 계층도 달라졌고 그들이 속한 세상도 바꾸었기 때문이다. 대화의 내용, 가족 구성원끼리 교류하는 방법, 심지어 선물하는 취향까지도.
언어의 문제 -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와 딸
농사꾼 할아버지의 리터러시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 양반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셨지."(23) 학교에 다니던 아버지의 학업을 중단시켰고, 농장에서 일하게 했으며, 사투리를 사용했다. 그에게 비정신적인 것의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자영업자인 아버지의 언어는 "langage de charretier(짐수레꾼의 언어)"였다. 상스러운 말이며,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의 언어로, 사투리에서 불완전하게나마 벗어났다. 그는 할아버지보다 비물질적 자산을 조금이나마 더 가지고 있었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더 이상 <농사일 culture>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땅을 가지고 하는 일을 항상 그렇게 불렀는데, 이 culture란 단어가 가진 또 다른 의미, 즉 정신적인 의미는 그에겐 불필요했다."(33)
여기서 culture의 의미는 '경작하다'이며 문화나 교양을 의미하는 정신적 수양의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는 딸이 받는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느끼던 중, 교육받은 딸이 사회와 나라에서 자신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에 기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교육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효과만 중시하며, 딸에게 정신적 교류가 빠진 물질적 지원만 해준다. 이미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딸에게 그런 아버지는 너무나 먼 존재다. "언어에 관련된 모든 것은 돈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원망과 언쟁의 동기였다."(69) 아버지의 언어는 (교양 있는) 남편과 '나'의 정신적 세계를 대체할 수 없었고,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정신적 대화가 결핍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93)
아비투스의 문제 - 노동자와 중산층
언어, 생활습관, 문화 향유 등의 차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적 습관을 아비투스라 한다. <남자의 자리>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아비투스의 차이는 언어습관이다.
노동자 계층의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쾌활했다. 그는 웃는 걸 좋아하는 손님들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대부분이 은근한 음담패설이나 분뇨담이었다. 반어법은 개념조차 없었다. 라디오는 가요나 게임 방송 같은 것을 즐겨 들었다. 틈만 나면 나를 데리고 서커스, 웃기는 영화, 불꽃놀이 등을 보러 다녔다.”(69-70)
중산층인 딸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내가 Y… 의 중산층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먼저 내 취향에 대해 묻곤 했다. 재즈를 좋아하냐, 아니면 클래식이냐. 영화감독으로는 자크 타티가 좋으냐, 르네 클레르가 좋으냐. 그때 난 내가 또 다른 세계로 건너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70-71)
중산층의 질서를 배운 딸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상스런” 것, 고쳐야 할 것으로 보고 대립한다. 이는 딸과 아버지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넓히며 딸이 나이를 먹어 여자가 되어가고 지식인이 되어갈수록 심화된다. 딸과 아버지의 계층 갈등은 딸의 결혼과 독립 후에도 봉합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속한 노동자 계층과 딸이 속한 중산층 사이의 간극, 그리고 아버지가 교육을 통해 계층이동에 성공한 딸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병기된다. 딸은 아버지가 그저 자신을 “굶기지 않”는 기초적 욕구의 충족자이길 원하지 않는다. 먹고 자는 등의 기본적 차원에서 나아가지 못한 그들의 대화는 “어렸을 때 하던 얘기”에 머문다. 딸의 세계에 속한 깊은 이야기, 철학이나 교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거리 좁히기와 애도
'나'가 택한 화해의 방식은 ‘거리 좁히기’이다. 부르주아와 농민이라는 사회적 계층의 거리를 좁히는 동시에, 딸과 아버지라는 개인적 관계의 거리를 좁히고자 한다. 이는 서술상 완전히 분리되었던 일인칭 ‘나’와 3인칭 ‘그’가 서술 속에서 ‘우리’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뿌리에는 아버지의 세계(=노동자 세계)가 존재하며 그러한 삶의 방식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다. 화자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가면서 세상에 밝혔어야 할 자신의 '유산'을 드러내 보였다고 고백(125)"한다.
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갈등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이 덧붙여진다. 교양 있는 자들에 대한 조소적 시선도 함께 드러난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을 때 그를 무시하는 직원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부분 등에서다.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문학적 세계를 가장 가까이 겪는 문학교사로서의 자괴감도 드러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현실의 생활고를 겪는 이들에게 교양과 사상, 이념 등은 사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mourning)의 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된 적 없었던 아버지와 그가 속했던 피지배 세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자 한 ‘나’의 시도는, 아버지 세계에 대한 멸시와 몰이해를 고백하며 반성하려는 노력이다. 아버지와 딸이 겪었던 계층 간의 이동 가능성과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아이러니를 가장 단적으로 제시하는 문장도 후반부에 서술된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27)
자신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감정을 들여다본 <남자의 자리>는 자전적 글쓰기가 주는 해방적 효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자서전 l'auto-socio-biograpie
'사회적-자서전'은 아니 에르노가 그의 저서에서 자주 시도하던 방식으로 '자서전+사회적인 것'을 합친 글쓰기이다. 주관성과 객관성,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역동적으로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는 장으로 자서전적 공간을 활용한다. 개인의 정체성 탐구보다는 집단 정체성 탐구에 방점을 둔다. 자신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온 소외 계층의 집단적 경험을 대필하는 것이다.
<남자의 자리>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하며 '나'는 개인의 삶을 평면화시키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한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간다는 느낌이 든다."(46-47)
생각해 볼거리
아버지(교육받지 않은 계층)가 직접 발화하는 텍스트는 불가능할까?
지금 우리의 삶도 문학이 될 수 있다면, non-fiction과 fiction의 경계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혹은 구분할 필요가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적-자서전'은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사회적인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