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신이함이 이야기와 만나는 곳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를 읽고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괴이한 이야기와 자극적이며 날 것인 소재와 귀신과 같은 불가사의한 일들로 가득 찬 삼국유사가, 괴력난신을 거부한 합리주의자 공자의 말로 시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들어 비교하며 ‘근원에 이르고 보니, ‘환상이 아니라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이라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8)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성스러운 이유는 무엇이고, 정사(正史)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삼국유사는 한민족의 역사를 관통하는 불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삼국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에도 한국의 사상적 기초에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의 사상적 조상이 되는 국가는 가장 최근의 왕조국가인 조선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민중 사이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았다. 지배계층인 왕과 양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유교였으나 기층 평민의 삶을 위로한 건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사상의 병존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이중 언어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상층 지식인은 문자로서의 권위가 있는 한자를 사용했지만, 민중의 욕망과 생활을 담은 소설은 한글로 향유되었다. 한글은 여성과 평민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평범한 민중의 욕망을 대변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또한 불교에 애착을 보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세종대왕은 한문 리터러시라는 주류 기득권의 변방에 밀려난 백성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글과 불교는 대중친화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한국을 돌아보면, 조선이 추구했던 유교와 배척했던 불교가 혼재된 채로 온존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의 인식은 전자보다 후자에게 호의적이다. 명절마다 제사를 지내거나, 책상머리 공부를 실용적 기술보다 가치있게 보거나, 여자보다 남자를, 연소자보다 연장자를 보다 우월하게 생각하는 정신 등은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소중한 전통보다는 타파되어야 할 악습으로 여겨지고 있다. 반면에 불교적 전통은 보살, 인연, 업보, 화두 등 다양한 일상 용어로 자리잡으며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 또한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업보로 인해 벌을 받는다는 불교적 세계관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인의 중요한 신념 중 하나로 남아있다. (물론 이는 불교만의 사상은 아니겠지만)불교의 수용과 확산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는 기복신앙적 성격과 환상적인 이야기 혹은 노래일 것이다. 이 두 요소에 담긴 인과응보의 메시지가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저자는 한반도 곳곳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허구인지의 경계는 모호하다. 하지만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역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동안 고유의 아우라를 형성하며 나름의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된 역사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믿음에 토대가 되기도 한다. 경주의 분황사는 불교의 기복신앙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덕왕 시절 희명이라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어,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의 천수대비를 찾았다. 노래를 지어 아이에게 부르게 했더니 눈이 떠졌다. 희명의 이야기는 관음신앙이 민중에 미쳤던 영향력을 암시한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빈다면 자비로운 관음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관음신앙의 정신은 대중적으로 파급력이 컸다. 희명의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천수대비의 자비를 증언하는 희망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조신 이야기는 ‘꿈’을 서사의 틀로 사용하는 동양적 전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신은 태수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이뤄질 수 없음에 괴로워하고, 잠에 든다. 그의 꿈 속에서 김낭자가 찾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 다섯을 낳고 잠시 행복한 한때를 보내지만, 가난해지고 자녀가 굶어 죽거나 구걸하다 개에게 물리는 등의 시련을 겪는다. 결국 김낭자와 이별하여 남쪽으로 떠나며 꿈에서 깨는데, 아이를 묻은 자리에서 돌미륵을 발견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은 짧고 덧없다는 불교적 메시지를 꿈의 허무함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이다. 간절한 소망도, 고통스러운 자책도, 스러지는 사랑의 슬픔도, 하룻밤의 꿈일 수 있다. 평범한 한 인간이 겪은 한 편의 판타지는 이야기의 수용자들에게 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을 것이다. 허무하지만 동시에 신비로우며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바탕에 불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익산의 미륵사터에는 유명한 향가인 서동요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서동은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선화공주가 자신을 밤에 몰래(혹은 알을) 안고 간다는 내용의 노래를 퍼뜨린다. 현대적 도덕 관념으로는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악행이지만, 그 당시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서동이 소문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이용할 줄 아는 슬기로운 이로 묘사된다. 선화공주가 궁에서 쫓겨나는 길에 서동을 만나 정을 통하면서 서동의 노래가 예언처럼 실현된다. 악질적인 소문으로 억울하게 쫓겨난 선화공주의 억울함은 우연한 발견으로 늦게나마 풀어진다. 서동이 금이 많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선화공주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에게 금을 선물하는 효를 행한다. 원(怨)을 자비로 갚는 불교적 이상향을 보여주며, 명예를 회복해 행복하게 살게 된다. 서동요를 통해서만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서동이 서사의 주체이고 선화공주는 그의 지혜로 얻는 상처럼만 느껴진다. 하지만 선화공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재해석해본다면 자신을 내친 부모에게마저 효를 행하는 선인이 결국에는 행복해지는 권선징악의 내러티브로 읽을 수도 있다.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은 진부하다는 비판이 있을 망정 가장 ‘잘 팔리는’ 대중 서사이기에, 서사의 종류와 매체가 다양해진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야기는 횡적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다양한 방식과 모습으로 수용되며, 종적으로는 시간 속에서 축적된 인간의 기억과 가치관을 반영하며 만들어진다. 또한 삼국유사의 이야기와 일연의 찬은 노래를 담고 있다. 전승을 더욱 용이하게 만드는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끝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저잣거리의 노래나 아이들의 동요가 민심을 담고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노래와 이야기가 곧 민족의 정신과도 맞닿아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괴력난신’이 아니라 신성한 이야기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20/06/24 우리말의어제와오늘 쪽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