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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칠도씨 Feb 05. 2023

내 삶이 여기서 끝날 수는 없었다

굶어 죽기를 각오하고, 회사에서 대학원으로

늘 생각한다. 

난 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걸까?


퇴사를 하고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원에 갈 거였으면, 재학 중에 학석사연계를 신청했어야 했다. 시간 낭비도 없었을 거고 학비도 크게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이던 나는 취업이라는 것을 꼭 해보고 싶었다. 매일 아침 인파에 낑겨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나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 무리에 속해보고 싶었다. 그들의 가슴팍에 자랑스럽게(?) 걸린 사원증이 그리도 부러웠다. 내 명함이라는 게 갖고 싶었고,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할 때 부끄럽지 않게 내보이고 싶었다. 돈을 벌어서 나만의 공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비로소 독립하여 진정한 '어른'이 되어보고 싶었다. 


원하던 현실적인 삶을 직접 겪어보니 나 자신에 대해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착각...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마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었을 뿐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던 일을 하려면 미래가 불확실해지기에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적당히 돈 괜찮게 주는 회사에 들어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일을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은 남는 시간에 취미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열심히 세뇌시켰다. 그러나 억지로 꾸민 모습으로 사는 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난 현실적인 사람이 아닌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의미 없는 삶이란, 그것이 어느 정도의 생계를 보장해 준다 할지언정, 내게는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회사를 다니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을 꼽는다면 "일은 재밌어요?"였다. 오랫동안 일을 하려면 하는 일이 재밌게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교육을 진행하던 상사와 다른 선배들이 나를 만나면 한 번씩 일은 재밌냐는 인사를 건넸다. 그때는 그렇다고 답했다. 일 자체의 재미보다는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해 피폐해져 가던 나를 구원해 준 회사와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컸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업무를 알아갈수록, 의미 없다고 느끼는 일에 하루의 대부분을 바치는 일상이 점점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키보드로 무엇을 두들기고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모니터 앞에 앉아 멍하니 고민했다.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아닌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지랄 맞은 상사, 안 맞는 일,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고민이었다.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나도 나름 능력이 있는데, 생뚱맞은 일을 하면서 매 순간 무시를 당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돈 버는 게 다 더럽고 치사하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뭐든 나을 것 같았다. 길게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상사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일이 안 맞아도 그럭저럭 버티려고 했을 수도. 등 따습고 배부른 현실 속에서 꿈은 젊은 날의 치기로 기억 속에 사라져 갔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유일한 동료이자 사수이자 직속상관은 회사에서 유명한 또라이였고, 무수한 전임자들이 도망간 그 자리에서 이 회사와 이 직무와 이 업계와 궁극적으로는 내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못 견뎌하는가... 인생 전체를 건 고민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온 그는 소크라테스를 뺨치는 산파법의 달인인 것일지? 

그간 배운 이 지식들이 내게 흥미로운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배우고 이를 경력 삼아 이직하면 평생 싫어하는 일을 하고 살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여기서 1년 혹은 2년을 채워서 경력 이직을 하면 뭔가 달라질까? 아니다.

아니, 당장 내가 여기서 오늘과 내일을 버틸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자꾸 멍청하다고 구박하는 상사의 말마따나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 더 잘하는 일이 있었다.


절망의 바닥에서 계속 헤매고 있자니 지금 선택한 진로와 완전히 다른 어떤 길의 실마리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달리 하고 싶었던 일이 없다면 버티는 것만이 방법이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고 싶었으나 현실의 벽에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높아질 것이고 어느 순간 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을 굳이 끌어오자면, '도둑질'이 내게는 공부였다. 그것도 법학 공부나 코딩 공부였으면 좋았으련만 배고픈 인문학이었다. 늘 죽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지만, 여행을 할 때 그리고 웃기게도 공부를 할 때만큼은 모든 걸 잊고 열중할 수 있었다.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 대상에 젊음을 바치는 일은 결과가 실패일지언정 가치 있는 시도일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서야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전공을 극한으로 공부해 보자. 그 결말이 석사든, 박사든, 그 이상의 무엇이든.


꿈을 좇는 삶과 현실을 버텨내는 삶, 양립 불가능한 두 삶을 비교해 본다. 

잘하고 좋아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거나 적어도 이루려 노력하)는 삶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쓰고 있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꿈은 요원해질 것이다.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명함을 내밀 수도 없고, 사무실에 앉아서 달마다 300만 원씩 벌 수도 없고, 회사가 주는 복지혜택을 이용해 여가를 즐길 수도 없다. 남들이 자리를 잡는 나이까지 불안정한 미래를 참아가며 보상이라곤 자기만족 밖에 없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너무도 익숙해서 더욱 벗어나고 싶었던 가난한 삶으로의 회귀일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도 상상해 보았다. 석사학위까지 따놓고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못해 애매하게 가방끈만 긴 30대 여성으로 사회에 다시 던져지는 것. 혹은 박사까지 갔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희망고문으로 하루하루를 태우는, 취업을 생각조차 못하는 늙은 내 모습. 부모님 집에서 쫓겨나 반지하 셋방이나 고시원을 전전하다 연탄을 피워 자살하는 비참한 말로. 여기까지 상상해 봤는데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굶어 죽을지언정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연약하다. 

회사에 남아있는 동기들이 명절 보너스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할 때나 통 크게 돈을 쓰는 모습을 볼 때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소비를 줄여보아도 플러스 없이 마이너스만 찍히는 통장을 볼 때마다 등록금이 괜찮을지 계산하는 머릿속 셈을 멈출 수 없다. 꿈을 찾아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데에 필요한 용기는 나 같은 겁쟁이에게 허락된 용기보다 훨씬 거대함을 매 순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되지 않는다. 


진심을 담아 힘들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돈 버는 일보다 의미 있는 것이 뭐가 있냐고.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정말 멋있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삶의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돈을 벌어도 삶의 의지를 느끼지 못한다면, 매일 출근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에 그 정도 권리는 있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솟아났다. 놀고먹으려고 도망친다는 시선이나 회사생활을 못 견딘 낙오자라는 자괴감도 참을 수 있었다. 열정 같은 건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격동이 싫지만은 않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유명한 동화가 있다. 

어느 날 태어난 애벌레가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던 중 하늘로 올라가려는 애벌레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탑을 발견한다. 그 무리에 합류한 애벌레는 결국 그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지만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아래에서 위로 밀려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과 그들에게 밀려 땅으로 떨어지는 애벌레들 뿐이었다. 다시 땅으로 떨어진 애벌레는 죽음과 비슷한 순간을 맞았다가, 용기를 내어 고치 안으로 들어간다. 고치에서 나오자 그는 나비로 변해있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거대한 애벌레의 탑을 지나쳐 높이 날아간다. 

삶의 전환기를 맞이할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특히 세상의 잣대에 비춰보았을 때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을 하게 될 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힘겹게 도착한 탑의 꼭대기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탑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고치를 만들기 위해 땅으로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물론 회사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탑에서 버둥거리는 어리석은 애벌레라고 매도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니까.)


글의 시작에서 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다. 동시에 내가 직접 겪어봐야 깨닫는 사람이라 적어도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미련스럽긴 하지만 결정을 내린 뒤엔 우직하게 갈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이제야 막연한 동경보다는 내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꿈과 현실이 있을 때, 꿈이 딱히 없는 사람도 있고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 그 둘 중 어디도 아니었다. 내가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인지 아는 건 쉬울지 몰라도,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인 것 같다.


"누구나 재능은 있다. 드문 것은 그 재능이 이끄는 암흑 속으로 따라 들어갈 용기다." - 에리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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