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여름, 자대 선배와의 만남
B 교수님은 지난 학기 간사였다는 한 선배를 소개해주었다. 알려주신 연락처로 카톡을 보내다가 바로 그 주에 약속이 잡혔다. 그렇게 만나게 된 첫 대학원 선배는 그 이후에 만난 대학원 사람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야망이 넘치고 계획적이고 철저한 스타일이었다는 뜻이다(국문과 대학원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될 정도로 욕심도 없고 대책 없이 살아가는 느낌이 강했다). 그는 공부든 운동이든 돈이든 외모든 다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모든 걸 가지려는 열정이 존경스럽기도 했고 기가 죽기도 했다. 학창 시절의 나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 나란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 잘 알게 되어 무엇이든 다 가질 수는 없다,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많아졌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력을 믿고 기록을 따로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강박적으로 모든 걸 기록하려는 나와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속으로 위축되고 거리감을 느끼든 말든, 그는 내 경력이랄 것도 없는 경력으로 나를 높이 평가한 듯했다. 여기(대학원)에는 회사를 다니다가 온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러이러한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하면 ‘힘들었겠다…’할 뿐이었는데 확실히 경험해 본 사람은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며, 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회사생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다. SNL에서 주현영이 연기한 남초회사에 들어간 여직원 쇼츠를 보여주며 정말 이러냐고 묻기도 했다. 점심을 너무 빨리 먹고 말도 없이 먹고 다 먹고 눈치 주는 상황이 정말 공감이 갔다. 나중에는 밥그릇 뚜껑을 안 보이게 덮어놓는 습관이 생겼다고 하니까 안쓰러워했다. 본인은 국제기구와 일하는 여초회사를 다녔는데 퇴사율이 100%였고 4-5개월을 버틴 자신이 동기 누나 한 명을 빼면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초회사라 그런지 중식집은 안 가고 멕시칸 식당을 많이 갔다고 했다. 신입이라 자기가 리스트를 몇 개 골라도 업무적인 것도 아닌 걸로 구박을 하고 기를 누르려고 했다고 한다. 참 이상한 회사는 다양하기도 하다.
카페에 이어 예정에 없던 식사까지 하게 되었는데, 남초회사라 중식당에 많이 갔다는 내 말이 떠올랐는지 중식 어떠냐며 농을 치셨다. 퇴사한 지 좀 됐으니 괜찮다고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선배가 재직 중에 지겹게도 갔을 멕시칸 비스무레한 패스트푸드점을 가게 되었다. 내가 얻어먹기 죄송해 밥이라도 사려고 하니 그는 계속 막으며 “이번에 드시고, … 열심히 하세요.”라고 멋지게 답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궁기가 줄줄 흐르는 국문과 대학원에서 처음 본 후배에게 밥을 사준다는 건 흔치 않은 이벤트임을 알고 나서는 선배가 베푼 호의에 더 고마워졌다. 선배는 내게 학부 시절 동아리는 하지 않았냐고 물으며 사람들이 다들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친구가 없던 상태라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대학원에서 비로소 단짝이라고 할만한 친한 친구들을 사귀고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넓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쌓은 걸 보면 (대학원 기준으로) 선배의 보는 눈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석사 생활 중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뭔가요?" 선배는 이 질문에 “문집 만드시려고요?”하고 웃고선, "이건 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전부를 담는 질문이네요."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학원생들이 자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다른 선배들께도 이런 거 물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가장 먼저 강조한 건 운동. 머리를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대로 몸을 써야 균형이 맞기도 하고, 공부 외에도 집중할 만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건강이 무너지면 체력도 무너지기 때문에 평소에 잘 관리하라고, 특히 눈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도 강조했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이 길만이 내 길이다’ 혹은 ‘이거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하면 불행해진다고 했다. ‘교수해야지’도 마찬가지고. 선배의 조언은 야심은 가지되 막다른 길로 스스로를 몰지 말자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 외에 다른 가능성도 찾는 시간도 필요할 거라고 했다. 대학원 사람들과 잘 지내고 연애도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하셨다. 공부, 돈, 건강, 외모… 모든 면에 있어서 열심히 살라고, 오히려 양자택일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불행할 수도 있으니 다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낫다고 하셨다. “예전에는 소개팅도 많이 들어오고 저도 당당했는데, 이제는 뭔가 위축되기도 하고… 먼저 물어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대학원생인데 그쪽도 괜찮으시대? 하면서.” 그러나 대학원생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내가 내재화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다른 존재로의 ‘나’도 가지고 있기, 사람 다양하게 만나고 부딪혀 보기, 나만의 방식 찾기 등이 그가 강조한 일이었다.
- Visualizing 중요. 국문과에는 발제를 할 때도 글 써온 것 그냥 읽는 사람들이 많다. 시각화하는 능력 계속 가지고 있으면 큰 도움 될 것.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기.
- 현대문학 오길 잘했다. 규모가 크고 분위기가 좋은 곳이 아무래도 지원받기에도 유리하다. 고전문학에 관심 있으면 그 수업도 조금씩 들어도 된다.
- 발제=토론거리를 던지는 것.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고 해당 텍스트의 한계나 의의, 혹은 다른 텍스트와의 비교를 할 수도 있다. 분량은 교수님마다 다르지만 A4 8~10장 정도. 대학원생 수업은 그 주차의 수업을 교수님과 같이 준비한다고 생각하고 토론을 이끌어야 한다. 주장을 펼칠 때는 논증이 되어야 한다.
- 돈 버는 법: BK21의 경우 석사는 거의 하지 않고 박사도 수가 많아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과외 알바는 너무 많이 하지 말 것. 주객전도가 될 수 있음. 특히 학원 알바 중 전임은 하지 말 것. 학기 초 조교 알바는 9월 첫 주차에 공지 올라올 것. 가리지 말고 바로 지원하기. 금액은 180만 원, 250만 원, 전액 등으로 다르다. 전액의 경우에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인데 사무실에 붙박이로 있어야 하고 일이 많긴 하다.
- 영어 놓지 말기. 한자도 알면 좋다. 외국어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 많다. 한자를 알면 식민지기, 50년대 문학 공부가 가능하다. 언어 때문에 연구에 제한이 없도록. 시를 공부하려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게 좋다.
- 원문 읽는 것 중요.
- 세미나가 제일 중요하다. 세미나는 학생들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세미나는 책 읽고 토론하는 것. 수업 자체만으로 석사 논문 주제 발견하기 어렵다. 혼자 공부하다 보면 금방 지치기 때문에 세미나에서 서로 페이스를 지켜줄 수 있다. 혹은 스스로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모집할 수 있다. 학과에 홍보 부탁 가능.
- 시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 교내, 외부(서울 시내) 연구소. 공부할 수 있는 계기는 어디나 있다. 국문과가 꼭 아니어도 가능하다.
- 의외의 분야에서 내 흥미를 찾을 수도 있다.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자.
- 네 학기 동안 3개/2개/3개/2개 정도로 나눠 듣는 경우가 많음. 수업 하나마다의 로드가 꽤 크지만 열심히 하겠다 하면 더 많이 들어도 된다.
- 청강: 청강 방식이나 요구되는 과제는 교수님마다 다르다. 어떤 교수님은 발제와 기말보고서를 수강생과 동일하게 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청강은 사전에 문의해야 한다. 이 수업이 연구에 어떻게 도움 되나를 생각하고 신청.
- 연구학기: 제적 상태로 연구등록비(정규 등록금의 12%) 내고 연구지도 수업만 수강.
- BK21: 서울에서는 성균관대와 연세대만 하고 있음.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한 학기를 유예하고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 지도교수: 미리 메일 드리고 연구계획서 proposal. 첫 번째는 거의 까임.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것과 직접 쓰는 건 다르다. 석사 3~4학기쯤에는 구상해 놓기 시작할 것. 주제 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걸 보는 게 좋다. 시, 영화, 외부 세미나, 학위논문 등 비슷한 사람들이 뭘 공부하나 살펴볼 것. 석사논문을 이미 쓴 선배들의 이야기 들어보기. 무엇을 연구하셨는지 물어보고 친목 자리 나가도 좋다. 60~70장 되는 분량을 채울 수 있는 내용인가 검토할 것. 문제의식이 얼마나 구체적인지가 중요.
- 학기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좋다. 석사 논문 준비할 때 의지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 친구들과는 멀어져서 외로워진다)
- 좋은 논문, 쓸만한 논문은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말로 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문장이 지문 같은 멋진 글을 쓰자. (ex. H 교수님: 중간 인용으로 타성적 목소리를 여럿 직조하여 논문을 쓰심. 절묘한 문장들. 문장의 맛은 공부의 깊이에서 나온다. 선배 왈, "저는 글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좋은 문장이 있으면 필사도 해보고.")
- 좋은 논문 찾는 법: 키워드 찾고(국문학에 한정 X), 감식안이 있어야 한다. 중요한 참고문헌은 또 참고하게 됨. 믿을만한 필자 or 내 스타일의 저자는 기억해 두기=필자 따라가기(선배가 선호하는 방식) 약탈적 학술지 조심(투고하지도 말고 참고하지도 말 것). 믿을만한 학술지 찾아내기. 이해된 걸로 확대해석 X. 그걸 넘어서는 더 큰 주장을 찾아내도록 노력할 것. 많이 부딪혀보는 것이 중요. 암중모색.
- 1학기 때는 소설을 읽을 때의 접근법, 문학 연구란 무엇인지 고민해 보기. 2학기 준비 시작(교수님들이 해당 주제에 대해 쓴 논문 읽기). 3학기 자격시험(21학점 이상).
- 문학사적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함. 이러저러한 작가들을 붙여서 볼 때 어떤 논점이 나오나?
- 석사로는 인정받기 어렵고 경력 살리려면 박사 무조건 해야 한다. 연구기관에서 석사학위 인정하지 않는다. 단, 창작에 재능이 있으면 박사학위 없어도 비평가, 시인, 소설가 등 할 수 있음.
- 대학원에서는 얼마나 얻어갈 것인지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매우 달라짐.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도 있음. 시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함.
- 교수님들은 다 인격자라서 텀블러 사건 같은 건 없음. (← ㅎr... 이 조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나중에 따로 글을 쓸 것이다) 구조적으로도 갑질이 어려운 것이 거의 교류가 많지 않고 대학원생들끼리만 많이 지낸다. 부당한 일 전혀 생기지 않는다. 세미나 등으로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 있음.
- 논문 주제를 정할 때 그간 들은 수업 중 재미있는 게 있었다면 연결하는 것이 Best.
한 분야의 전문가는 그 분야에서 해볼 수 있는 실수를 다 해본 사람이니 실수해 보면서 자기의 스타일을 찾아가라는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잠깐 딴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해볼 수 있는 실수를 다 해본 사람은 비로소 인생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인간의 삶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짧기에 다들 인생의 작은 조각만 더듬다가 죽게 되는 것이겠지. 같은 맥락에서 천 번을 흔들려야 나무가 된다면 나는 잘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