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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탈희 Sep 14. 2023

왜 저 사람 때문에 제가 병원을 다녀야 하죠?

상담이야기 2

3주가 지나고 상담 날이 되어서 병원에 방문했다.

약을 꾸준히 챙겨 먹은 덕분에 마음이 안정되고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도 수월했지만,


역시나 빌런은 애써 약물로 높여놓은 나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강도로 스트레스를 준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고, 내 앞날은 캄캄하게 느껴졌다.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다.


"어째서 병원에 가야 할 사람들은 병원을 가지 않고, 저처럼 그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병원을 가야 하나요?"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고 병원을 다녀야 해'라는 생각은 중심이 나에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억울한 감정만 들죠.


그리고 그런 생각에는 병원에 가는 것을 나쁘고 부정적이게 보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예요.


병원에 가기 싫은데,

병원이나 다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싫은데,

저 사람 때문에 억울하게 내가 병원을 다니게 된 거니까요.


하지만 '저 사람은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고칠 생각이 없구나, 주변으로부터 평판이 나쁘고 아픈 상태인데도 모르는구나.

나는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하고 더 건강해지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병원을 가는데.'라고 생각하는 게 자기가 중심에 있는 생각이고, 그렇게 하면 억울한 감정이 생기지 않아요."





공무원 임용 동기 언니가 있는데, 나와 성향이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언니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공무원을 그만두었고, 나는 고향으로 전출 가면서 서로 사는 곳이 멀어져 가끔 얼굴 보며 지내고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고 3시간 동안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역시 마음이 통하니 정말 좋았다.)


언니는 예전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우울증으로 헛것이 보일 만큼 아팠었다.

병원을 다니고 치료를 받았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굳이 마음 건강은 어떤지 물어보지 않고 지냈었다.


현재 나도 힘이 들어 병원을 다니게 되다 보니 조언을 구할 겸 지금은 어떤지 물었다.


계속 병원을 다니는지, 건강은 어떤지.


언니의 대답은?


"공무원 그만두니까 싹 나았어. 그만두고 나서 너무 호전돼서 병원 안 다닌 지 꽤 됐어."


 "진짜...?"


"응, 미친 인간들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받았던 거 생각하면 정말... 으휴."



역시...  퇴직만이 답인가???






의사 선생님께 또 물어봤다.


"지금 주변 환경이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은 환경에 따라 바뀌기도 하잖아요.


저는 지금 직장도, 사람도, 지역도, 일 자체도 안 맞는 것 같아요.

저도 그 언니처럼 그만두면 낫는 거 아닐까요?"


역시나 선생님의 답은 같았다.


"그 생각도 결국 주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 환경은 결국 자신이 선택한 거예요."



"하지만, 상황이 저를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하고 공무원을 하게 만들었고, 지금껏 그만두지 못하게 만들었는걸요.

가장 예쁜 저의 20대와 30대 초반이 이렇게 맞지 않는 답답하고 보수적인 조직 속에서, 나쁜 조직 문화에 희생당하며 사라져 버린 게 억울해요.

진작 그만둘 걸 후회가 돼요.

못 그만두게 말렸던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요.


장녀인 데다 부모님이 힘든 상황이니까 제 꿈만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상황이 저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책임감 때문에, 돈 때문에, 가족 때문에, 그리고 이직할 능력이 없는 부족한 제 자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게 정말 힘들어요."




 "그 모든 건 본인이 선택한 거예요.

공무원이 되기로 한 것도, 그만두지 않고 참기로 한 것도, 가족을 위해 지방에서 살기로 한 것도요.


'가족 때문에, 장녀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남들이 그만두면 후회한다고 말려서'라는 말은

결국 같은 맥락이에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에 휘둘리며 내가 중심에 있지 않은 거예요.


본인이 어디에 가치를 두냐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 생각해보세요.


꿈을 좇는 것도 좋지만, 가족에게 더 가치를 두고 공무원을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됐다는 것은 결과는 같지만 생각이 달라요.


그만두는 것도, 저 사람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것과 내가 굳이 참으며 일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두는 것은 달라요.

전자는 억울함이 생기겠지만 후자는 아니에요. 내가 참기 싫어서 그만둔 거니까,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거든요.


상황에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겠지만,

그러나 그 선택은 자신이 한 것들이에요.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나로 살아야 해요."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선생님은 본인의 팩트폭행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오해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이유는

나로 살지 못하고, 주변 눈치를 보면서 끙끙대던 내 모습을 한발 떨어져 보게 됐기 때문이었다.


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빈껍데기로 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아닌, 나도 나를 모르겠는,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내 자아가 보였다.


답답했다.


꽁꽁 묶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들었다.



선생님은 우울증 약을 가장 약한 단계로 처방했었는데, 용량을 조금 늘려보자고 하셨다.

혹시 매스꺼운 부작용이 3일 이상 느껴지면 약을 반으로 쪼개어 복용하면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은 생겼지만, 여전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지고, 모든 것을 관두고 싶었으며, 그냥 지구가 망해서 다 같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복용량을 늘리잔 말이 반가웠다.


약을 먹으며 평안한 마음을 갖기,

열심히 상황 해석을 바꿔 생각하는 훈련하기,

나 자신의 주도권을 찾기 위한 고민을 하기로


스스로에게 숙제를 줬다.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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