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 빌런

by 수험생

독서실의 정적은 그림판을 만든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 가방 지퍼를 올리는 소리, 심지어 날파리가 지나갈 때 생기는 바람소리도 정적이라는 그림판 속에서 각자의 그림을 그린다.
대부분 금방 사라지는 물감으로 분위기만 내지만, 가끔씩 눈치 없는 것들이 네임펜으로 찐하게 그들의 그림을 그린다.
네임펜으로 칠한 그림은 멋도 없을뿐더러 물에 젖은 양말처럼 불쾌한 지속성도 지닌다.


특히 내 옆의 두 놈이 지금 그리는 그림은 걸작이다.
주위의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 저 대범함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녀석들의 저 열정에 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씩 몸까지 돌려 그들의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그때 보이는 뒤통수를 보면 내 오른쪽 손이 자꾸 움찔움찔 거린다.
나도 나만의 창작욕구가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잠시 마음 가다듬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순간 녀석들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자기들이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노려보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어서 다시 그들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한 순간, 반대편에서도 조용한 일침이 녀석들에게 전해졌다.
(순간의 정적, 지금 와서 느끼니 오히려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해 보인다.)
이 정도의 눈치를 줬으니, 아마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제야 편히 내가 하려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녀석들의 자아성찰의 시간이 짧았던 것인지, 단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작정하고 대작을 그리려는 것인지 그림판의 크기가 관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피 튀기는 최종국면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눈치를 보낸다, 자기가 하는 건 죽어도 싫어하는 이기주의자들 혹은 소심이들이 서로에게 밀고를 강요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맡기는 책임전가 경향은 나 또한 예외는 아니지만, 난 저들과 달리 지금부터 10분 동안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듬직해 보이는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허리만 한 팔 두께를 지닌 그 사람은 녀석들의 그림에 화가 잔뜩 오른 듯 행주처럼 구겨진 얼굴로 압박감을 조성했다.
멀리서 보아도 느껴지는 그의 분위기는 여기 있는 사람들 거의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물론 그 조여 오는 압박감을 바로 앞에서 느끼는 녀석들은 제외였다.
그가 다가오는 그 찰나의 순간순간 마다 녀석들의 감정에는 여러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가 꽤 멀리 있을 때 녀석들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지만, 그가 대략 중간쯤 도착했을 때 녀석들의 이마에 긴장의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가 거의 눈앞에 있을 때 공포에 압도된 녀석들의 표정은 그들이 만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유쾌했다.
(아마 그 표정은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그가 녀석들 앞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 대부분은 귀 혹은 눈으로 신경을 집중시켰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녀석들의 창작의지를 꺾어줄 저속한 말들을 여러 사람이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바깥문을 가리키며 따라오라는 제스처만 취했다.
귀에 신경을 집중시킨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직감했을 때 녀석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짐을 챙겨 그와 함께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 모를 찝찝함이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녀석들의 참혹한 미래를 생각하니 상당히 꼬수워 찝찝함이 잦아들었다.


마침내 녀석들의 그림이 막을 내리자, 나는 내 일에 집중하며, 간간이 보이는 짤막한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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