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기다림과 건방진 생각
촘촘히 잠겨있는 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찌뿌둥한 머리에, 전기 신호가 고장 난 듯한 오른팔에, 젖어있는 윗도리에, 상황은 최악이지만 내 머리도 고장 났는지 기분은 그럭저럭 좋다.
이불을 걷고 시간을 확인해 본다.
자그마치 3시간이 지나있었다. 원래 멍한 머리가 더 멍해졌다고 느껴졌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잠깐의 휴식에 3시간을 소비했다는 것은… 가성비가 너무 나쁘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니, 몸은 안심해 배꼽시계를 울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먹지도 않고 하교 후에 이불을 덮고 내리 3시간을 기절해 있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껌껌한 베란다로 가서 밍기적밍기적 비빔면 2개를 골라 집는다.
“이 시간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눈을 비비며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낼 주말이잖아요, 괜찮아요.”
말하기 3초 전까지만 해도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뛰어난 머리 회전이다.)
“... 그래, 다 먹고 양치하고 자.”
그러곤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말 끝에 붙인 양치 하라는 말은 최근 내 이빨에 생긴 충치 녀석들이 어마무시한 치료비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덜컥 나온 말일 것이다.
비빔면을 뜯어 면과 소스를 분리한다.
둥근 원 형태는 그만큼 면의 양이 줄어든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은데, 비빔면처럼 꽉 찬 정사각형 면은 어쩐지 맘이 따뜻해진다.
냄비에 물을 받고 인덕션에 올린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획득하였다.
그 짧지만 매우 긴 시간 속에서 난 다급하다.
유튜브 영상을 찾는 동안 다 만든 비빔면이 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비빔면과 함께할 최고의 동영상을 찾아야 한다.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이곳저곳에 퍼져있는 영상을 확인해 본다.
다행히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길이도 18분짜리라 안심하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텅 빈 시간을 채우고 나니, 물을 담은 냄비가 열을 받아 화를 내고 있었다.
신속하게 뚜껑을 열어 면을 넣어주었다.
비빔면은 면이 빨리 익기에 잘 익은 김치나 젓가락을 꺼내고 잠시 멀뚱멀뚱 서 있으면 보기 좋게 풀어진다.
흐뭇하게 익은 면을 바라보고 뜨거운 물을 버려준다. 이후 면에게 몇 번의 물고문을 진행해 주면 대략적인 조리는 끝이 나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밥을 다 짓고 잠시 뜸을 들이듯, 면에 차가운 물을 넣어주고 잠시 기다려야 한다.
(작년까지 이 방법을 몰라 애꿎은 면에 여러 차례 물고문을 해도, 막상 식사를 할 때 기분 나쁜 뜨끈함이 남아있었다.)
잠시, 그렇게 기다린다.
그리고 기다림에 대해서 조금 건방진 생각도 해본다.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하려고 할 때 잘 되지 않는다면, 그건 기다림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정열이라는 불꽃에서 몸이 너무 뜨거워 버티지 못해 뛰어다녀 정신없이 지내는 것이 아닐까.
활활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그 열의 전도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난 공부하는 방식을 체화시키기 전에, 다른 방식으로 도망친 것이 아닐까.
그 순간 실소가 터져 나왔다.
건방진 생각이기에, 그런 생각이라고 판단했기에 나온 웃음이다.
이제 물을 버리고 비빔소스를 넣어 비벼준다.
빨갛게 된 면과 잘 익은 열무김치를 함께 입안에 욱여넣는다.
먼저 시원하게 문을 여는 열무김치의 아삭함을 느끼고, 훅훅 들어오는 새콤하고 매콤한 비빔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입, 두 입… 어느 순간 초소형 면 조각만 냄비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냄비를 물에 담가 놓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 전의 웃음은 실소가 아니라 조소이지 않았을까.”
씁쓸하게 혀를 차며 화장실로 들어가 입을 헹구고 이빨을 닦아주었다.
이후 방에 들어가 잠이 들 때까지 입안에 남아있던 얼얼함은 사라졌지만, 머리에 남아있던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