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나에게

by 수험생

깨어진 둑에 마리아나 해구의 수압으로 무엇이든 집어넣으면 언젠가 가득 찰 둑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나의 태풍 같은 신념이 바래져 간다.

백색소음이 감도는 익숙한 자리에서 이러한 신념의 붕괴가 당최 무엇을 야기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어영부영 넘어가는, 단기적 컨디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절보다는 기약 없는 이별에 가까운, 내 심장 속 핏빛 쇠사슬을 서서히 조여 오는, 그런 섬뜩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옆자리, 기운으로 느껴지는 녀석이 우당탕탕 팬을 떨궜다.
그녀는 양쪽으로 굽이굽이 머리를 땋고 갸름한 얼굴 곳곳에 여드름이 피어있었다.
순박한 얼굴, 아직 빛나는 작은 그녀의 깨진 부분에서 팬이 떨어졌다고, 쿡쿡 찌르고 있었다.

우울함과 불안함 어딘가로 요동치는 마음에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일직선으로 쭉 깔린 회색의 복도는 끝에 갈수록 바래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나아가야 할 복도가 너무나 불쾌해 야만적인 발걸음으로 뛰어갔다.
숨을 부여잡고 계단의 문턱에 도착했다.
전등이 반가워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쥐똥만 한 구멍을 막으려는, 나름의 이성적인 나 자신을 지켜볼 때도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에 스스로를 용광로에 집어넣으려고 할 때
나는 돌이킬 수 없다고, 형태를 잃을 것이라고... 겁쟁이가 된 것이다.
한 움큼 쥐어지는 적나라한 숫자를 볼 때마다, 솟구치는 의구심에 그 파멸적인 공간에 들락날락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항상 나였다.
수차례 다짐만 하는 다짐쟁이.
척만 하는 척쟁이.
겁만 먹는 겁쟁이.
모든 언어와 맥락이 나를 꼬집는다고 느낄 때,
용광로가 아닌 어디 멀리에 있는 소각장에 버려진 것 같았다.

꼭 나를 지켰어야 했을까.

유리창에 겉도는 달과 별과 바람과 그 사이를 채우는 검은 불빛들
오늘은 나를 위해 비추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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