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개의 칼날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쪽은 나를 벤다. 다른 한쪽은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베게 한다. 나는 늘 그 가운데 서 있다. 도려내는 것과 찔러넣는 것 사이에서, 나는 피를 흘리며 걷는다. 이 위태로운 줄타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던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내 안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른다. 하나는 나를 정당화한다. "너는 상처받았기에, 칼을 들 자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나를 지운다. "네가 찔렀기에, 존재할 자격은 없다." 나는 둘 다 믿는다. 나는 둘 다 따르고, 나는 둘 다 배반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친구와 다투며 그의 얼굴을 할퀴었던 날.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과 뺨에 남은 붉은 자국.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가해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에 남긴 죄책감은 나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칼날 위에 발을 디뎠다.
어느 날, 나는 자발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법이 없고, 정의도 없고, 의미는 더더욱 없었다. 오직 손가락과 주먹과 숨 막히는 증오만이 공간을 지배했다. 나는 그 공간을 '고향'이라 불렀다. 나의 탄생은 언제나 폭발의 중심에서 이루어졌기에.
나는 폭력을 견제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나는 폭력에 귀속되러 갔다. 나는 그곳에서, 도끼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나를 실현했다. 폭력으로서의 나. 혐오로서의 나. 지울 수 없는, 오히려 스스로 선명해지는 나.
대학 시절, 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 매료되었다. 그의 철학은 내게 가해자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강함은 선이고, 약함은 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그러나 졸업 후 사회에 나와 경험한 현실은 달랐다. 권력의 남용, 강자의 횡포, 약자의 고통. 그 모습들은 내 도식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고 난 후,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울부짖었다. "지금, 네가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보았느냐." "지금, 네가 얼마나 익숙하게 타인을 망가뜨렸는지 기억하느냐." 나는 다시 찢겼다. 나는 나를 토해내고 싶었다.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잃을 때마다, 나는 피를 흘렸다. 때로는 남의 피였고, 때로는 나의 피였다. 가장 기이한 것은, 그 피의 색깔이 점점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아는 이 모순된 정체성들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었다. 칼날은 날카로워졌고, 발바닥은 얇아졌다. 균형은 이제 환상에 불과했다.
밤마다 꿈을 꾼다. 피로 물든 내 손이, 거울 속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는 말한다. "그래도, 살아남았구나." 그리고 나는 깨어난다. 살아남은 자로서가 아니라, 죽지 못한 자로서.
어느 가을날, 나는 공원의 텅 빈 벤치에 홀로 앉아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다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묘하게 평화로웠다. 그 순간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균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마치 내 안에서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다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것 같았다. 무언가가 내 내면 깊은 곳에서 풀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완벽한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화해였다. 내 안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화해시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이 깨달음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칼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칼날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관찰자도 아닌 통합된 자아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아니면 그 둘을 구경하는 제3의 의식인가." 이 질문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셋 중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되는 것. 그것이 온전한 자아의 조건이었다.
명상과 일기 쓰기를 통해 나는 내 안의 분열된 자아들을 만나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들 사이의 적대감과 불신이 너무 강해서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 가해자는 항상 정당화하려 했고, 피해자는 항상 비난했으며, 관찰자는 냉정하게 판단만 할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 화해의 지점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성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피해자는 자신의 취약함이 또한 강인함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관찰자는 더 이상 냉정한 판단자가 아니라, 공감하는 증인이 되어갔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가졌지만, 이제 그 목소리들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매일 걸어간다. 칼날 사이를. 폭력의 증인으로,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나를 재조립하는 자로. 제사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물결 아래에서, 나는 각자 다른 내면의 소리가 합창을 이루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내면 존재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하모니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칼날 위의 위태로운 균형과는 다른, 깊고 안정된 균형이었다. 그 균형은 하나가 아닌 여럿,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닌 복잡한 그라데이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칼날 위의 자아는 이제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화해의 균형이었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균형의 미학이었다. 위태로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능력, 그것이 칼날 위의 자아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