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한 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감정, 무너짐과 재건의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니나라는 여성의 기록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의 구조, 내가 감당해온 감정과 고통, 그리고 내가 택해온 방식들을 하나하나 반추하게 되었다. 니나의 문장은 마치 내 안에 있던 고백들이 먼저 쓰인 것처럼 정확했고, 그녀의 선택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모순, 그녀의 도피, 그녀의 무너짐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니나는 말한다. 죽음이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기에 다시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그 살아감이란 무섭도록 많이 아는 것이며, 모든 것을 파고드는 일이라고. 나에게도 삶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고, 읽고, 공부하고, 질문한다. 그것은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실존을 지탱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이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공부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유했다. 세상의 모든 질문들을 곱씹으며, 나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래서 나는 니나가 이해됐다. 그녀의 집요한 내면 탐색, 그녀가 극단을 갈망하는 그 열정이 내게는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나는 사랑을 선택하지 못했다. 아니, 사랑했기에 떠났다. 슈테인은 그녀를 이해했고, 그녀의 자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순간 니나는 그와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관계는 그녀에게 자유의 침식이었고, 사랑마저도 자기 정체성을 위협하는 구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멈춰 섰다. 니나처럼 나 역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가 사라지는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이해받는다는 감정조차 때로는 나를 더 깊은 감옥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는 때로 도망쳤고, 침묵했고, 멀어졌다. 이해받고 싶었지만, 이해받는 순간마저도 버거웠다.
니나는 결국 떠난 후에 퍼시와 알렉산더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고, 절망하고, 무너진다. 그녀가 도망친 슈테인은 자유를 이해하려 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그녀는 그가 아닌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비극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살고자 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무너졌지만, 바로 그 무너짐이 그녀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한 증거였다.
나는 『삶의 한가운데』를 읽으며 삶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되었다. 삶은 지겹고, 반복되고, 상실의 연속이다. 그러나 바로 그 상실의 감각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찰나의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진리는 맛만 보고 다시 빼앗긴다. 하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살아간다. 니나처럼 나도 느낀다. 생은 미치도록 강력하고, 정말 지겨우면서도 멋지다고. 이것이 내 고백이고, 내 방식의 생존이다. 삶이 무엇인지 묻는 그 질문 자체가 나를 갉아먹을지라도,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 질문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