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책 속 주인공을 만날 때마다 소멸을 느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희미해졌고, 그 사람의 감정과 기억, 고통과 사랑이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나라는 경계의 해체를 의미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열렸다. 현실보다 선명한 거리, 말보다 더 진실한 침묵,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순수한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계. 그곳엔 정의와 질서, 의미가 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더 명확히 존재할 수 있었다. 현실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누군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고, 내 감정은 설명할 수 없었으며, 하루하루는 부조리한 사건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상상 속 세계는 조화롭고 완전했다. 나는 그 안에서 ‘살았다’.
그래서 나는 믿게 되었다. 이데아가 있다고. 모든 것이 흐리고 깨지는 이 현실이 아니라, 언어와 감정의 혼돈 너머에 ‘형상’이 있다고. 플라톤의 철학은 내 체험의 메뉴얼처럼 느껴졌다.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는, 내가 몰입했을 때 열리는 그 완전한 감각 속에 있었다. 문학은 내가 신의 영역을 엿볼 수 있는 통로였고, 상상은 나의 신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앞에 서게 된다. 바로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은 직후였다. 사르트르의 소설에서 나는 나무뿌리를 바라보며 속이 뒤틀리는 로캉탱과 마주했다. 의미 없는 사물들이, 의미 없이 존재하는 상태로 다가왔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존재는 이유 없이, 말없이, 무섭도록 생생하게 거기에 있었다.
"신문이 있다. 그 옆에 사람이 앉아 있다. 그 사람의 옷은 파란색이다. 머리 위로 하늘이 펼쳐져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다. 그 구름엔 미묘한 음영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름을 지우고, 의미를 덜어내고, 사물의 맨 얼굴을 응시했다. 그제야 비로소 세상은 살아났다. 어떤 기호도, 목적도, 쓰임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피어났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최초의 감각, 언어 이전의 인식이었다. 그것이 바로 문학에서 말하는 ‘낯설게 보기’의 본질이기도 했다.
로캉탱은 존재를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그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로, 대상에서 주체로 옮겨가며 존재에 대한 자각을 깨운다. 구름, 의자, 나무, 내 숨결... 모든 것들이 의식에 폭력적으로 침입할 때, 로캉탱은 마침내 “나는 알았고, 나는 보았다”고 말한다. 그 순간은 진정한 ‘나’의 탄생이자, ‘세상’의 재탄생이었다.
이 경험은 나의 감각을 전환시켰다. 더 이상 나는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를 묻지 않는다. 존재는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하고, 의미 없이도 충만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다. 바람이 불고, 사람이 지나가고, 낙엽이 떨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도록 두고, 바라본다.
문학은 나를 이 세계의 외부자로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내밀한 내부자로 이끌었다. 나는 관찰자가 되어 존재를 바라보았고, 어느새 그 존재 속에 흡수되었다. 나와 세계의 경계는 흐려졌고,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이 아니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이 순간의 직면으로서 스스로를 갱신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몰입을 꿈꾼다. 사라지고 싶다. 없어짐으로써 전부가 되는 경험을. 주인공이 되면 내가 사라지고, 세계가 된다. 사랑하면 내가 사라지고, 타인이 된다. 존재 그 자체가 나를 덮쳐올 때, 나는 진짜 나를 만난다.
『구토』를 읽고 몸살이 났던 그 밤처럼. 나는 그때 존재의 냄새를 처음 맡았다. 역겨웠지만 잊을 수 없는 향기였다.
존재는, 그 자체로 완성이다.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은 충만하다.
나는 이제야 안다. 문학은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고, 상상은 나를 존재로 이끈 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상상 속에서 존재했고, 구토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나는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