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곰소댁은 새벽에 일어나 숙희의 아침밥을 짓고 어제 가져온 고등어에 무를 넣고 조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치와 콩자반 등을 상에 놓은 후 상보를 덮어 숙희가 일어나 먹을 수 있도록 해놓고 서둘러 영등포 시장으로 나왔다. 고창댁도 이미 도착해 좌판 위에 덮어두었던 비닐을 벗겨내고 있었다.
"일찍 나왔네. 고창댁! 오늘 기분은 어뗘?"
"아직도 세상이 어쩌코롬 돌아갈지 걱정이 되야서 진정이 안 되는구만 그려."
"오라버니! 오늘도 굿모닝이여."
곰소댁은 최사장에게도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기분이 솔찬히 나아졌는개비네 그려"
최사장이 활짝 웃으며 곰소댁의 인사에 대답을 했다.
"근디 말여 '약속다방' 미스리가 낙찰계 계주를 혔는디, 며칠 전부터 다방 문이 닫혀 있다고 난리들이네."
고창댁이 최사장이 듣지 못하도록 곰소댁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것이 뭔 소리여? 낙찰계라니?"
고창댁의 말에 따르면, 미스리가 운영하는 낙찰계는 시장 상인들에게는 일종의 '희망 사다리'였다고 한다. 매달 수백만 원씩 돈을 모아, 가장 높은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적어낸 사람에게 뭉칫돈을 몰아주는 방식인데, 급전이 필요한 상인들은 높은 이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앞다투어 종이에 숫자를 적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미스리는 그 모든 입찰표를 관리하며 상인들의 피 같은 돈을 주무르는 '시장의 은행장'이었다고 한다.
"아니 고년이 최사장이 저러코롬 시퍼렇게 살아있는디 무신 낯짝으로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계주 노릇을 했다는 말이여?"
"쉿! 최사장 들을라. 조용히 혀."
"시상에 벼룩이도 낯짝이 있제. 그런 잡년이 어디 있당가?"
곰소댁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태어남시부터 돈밖에 모르는 년이니까 그라제."
고창댁은 최사장이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해서 최사장네 가게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고년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응게 약속다방에서 가까운 저짝 청과물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낙찰계를 혔다고 그러더라고."
"근디 아파서 안 나오는 거 아녀? 괜히 넘겨짚고 도망갔다고 소문냈다가 당헐 수도 있는 일잉게 말조심 혀"
"아녀! 여시 같은 고년이 다른 곳에서 주문 오면 레지들 보냄서도 낙찰계에 가입헌 사람들 헌 티는 직접 노란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들고 댕기면서 형제상회 박 씨에게는 설탕 세 스푼을 넣은 달달한 커피를, 경산상회 김 씨에게는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내밀면서 궁뎅이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는 거여. 얼굴 반반헝게 김 씨, 박 씨, 이 씨할 것 없이 모도 다 홀랑 넘어가는 것은 당연헌 것 아니겄어? 이 세상에 열 여자 마다허는 놈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혀"
"그라믄 고년이 낙찰계 가입헌 남자들헌티 몸땡이도 줬다는 말이여?"
곰소댁이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소문은 자자헌디 워디 물증이 있능가?"
"무신 소문?"
"김 씨, 박 씨, 이 씨는 각자 즈그들이 미스리 애인인 줄 알고 있다는 거여."
"옛끼! 이 사람아, 설마 그럴 리가 있겄능가?"
"시장 바닥에 진즉부터 떠돌아다니는 소문인디 최사장허고 자네만 모르는 일인 개벼."
"아줌마! 고등어 두 마리와 갈치 큰 놈으로 한 마리 토막내서 손질해 줘요."
한쪽 손에 채소가 가득 든 시장바구니를 든 50대 아줌마가 곰소댁에게 말했다.
"아이고 손님! 우덜이 야그를 하는 바람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구만요. 잠깐만 지둘리쇼. 잉"
곰소댁은 싱싱한 고등어 한 마리를 꺼내 가위를 이용해 등, 배, 꼬리, 지느러미를 바짝 잘라내고 아가미 뒤쪽에 칼을 넣고 머리를 잘라냈다. 그리고 배 쪽에 칼집을 길게 내어 내장을 긁어내면서 비린내가 나지 않도록 척추 쪽에 붙어 있는 검붉은 핏덩이까지 꼼꼼히 긁어냈다. 다시 이를 흐르는 찬물에 깨끗이 씻은 후 4-5 센티미터 간격으로 토막을 내기 위해 칼로 내리쳤다.
"아!"
곰소댁이 외마디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곰소댁의 왼손 검지 한 마디가 댕강 잘려 나가며 피가 튀었다.
"어머나!"
고등어 손질을 기다리던 손님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놓치고 주저앉았다.
"워메! 워메! 이것이 뭔 일이여. 이 일을 어쩐당가?"
고창댁도 시퍼렇게 질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고등어의 미끄러운 등 위로 식칼이 미끄러진 것은 찰나였다. 둔탁한 소리가 도마를 울렸다. 평소보다 깊게 박히는 기분 나쁜 감촉에 손을 떼었을 때, 도마 위에는 고등어 토막 대신 낯선 조각 하나가 굴러 떨어져 있었다.
곰소댁은 처음에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잘린 검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장식물처럼 고등어의 은빛 비늘 곁에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려 나간 손가락 끝이 신경의 마지막 비명을 지르듯 움찔하면서 기괴하게 뒤틀렸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꼬리를 치듯 미세하게 경련하는 그 모습은 비현실적일 만큼 생생했다.
이윽고 단면에서 선홍빛 피가 울컥 쏟아지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부위가 아니라, 곰소댁의 손목에 붙어 있는 뿌리 쪽이 문제였다. 심장의 박동이 손가락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끊긴 단면에서 펄떡이며 요동쳤다. 엇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곰소댁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자기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움을 느낀 최사장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그는 고창댁에게 가까운 약국에 가서 거즈와 생리식염수를 사 오라고 한 후, 곰소댁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심장보다 높게 들어 올려야 출혈을 줄일 수 있당게."
의외로 최사장은 침착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회사 댕길 때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봤응게 너무 걱정 말어. 그라고 손꾸락도 빨리 병원에 가면 붙일 수 있어. 다만 시간이 생명이여. 그렁게 서두르자고."
"여그 생리식염수라는 것 허고 거즈 사 왔는디."
고창댁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와 소리쳤다.
최사장은 깨끗한 거즈에 식염수를 축축할 정도로 살짝 적시더니 잘린 손가락을 감싼 후 비닐봉지에 넣어 공기를 빼서 완전 밀봉을 했다. 그리고 다른 비닐봉지에 얼음과 물을 1:1 비율로 담고 손가락 마디가 들어있는 봉지를 그 안에 넣었다.
"손꾸락이 얼음에 직접 닿아 얼어버리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여. 그리고 언능 병원으로 가자고."
"고창댁! 성애병원으로 가는 택시 좀 불러 주쇼. 그라고 저 손님 고등어 손질은 고창댁이 좀 알아서 해줘야 허겄는디?"
"나도 따라가고 싶은디."
고창댁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잘 허고 올팅게 곰소댁 손님이나 좀 챙겨."
"기사 냥반! 언능 신길동에 있는 성애병원으로 갑시다요."
"거그 가면 내 손꾸락 붙여주는 의사 선상님이 있다요?"
곰소댁은 이제야 통증이 몰려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회사 댕길 때, 영등포와 구로공단 지역에서 발생허는 산업재해 환자들은 모다 성애병원으로 달려갔었응게 걱정 붙들어 매쇼. 재작년에 개원한 병원인디 공업단지가 밀집한 영등포 일대에서 절단 사고 환자를 가장 많이 받는 병원으로 아주 유명하당게."
곰소댁은 최사장이 옆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근디 오라버니 식당은 워쩌코롬 헌다요."
곰소댁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따! 이보다 중헌 일이 어디 있간디? 밥 먹으러 왔다가 주인이 없으면 다른 식당 찾아가겄지 뭔 걱정이 당가."
최사장은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곰소댁의 무릎을 손으로 툭 쳤다. 그런데 아픈 와중에도 곰소댁은 몸이 쩌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이 준 남녀 간의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미친년!"
"엥? 실수로 생긴 일을 가지고 워찌서 자기 자신을 욕헌당가?"
최사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곰소댁을 쳐다봤다.
곰소댁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 데 대해 놀랐다. 사실 그녀가 고등어를 내려칠 때 미스리 생각에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칼로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실수하고 말았고, 이번에는 자기도 모르게 욕까지 튀어나왔던 것이다. 곰소댁은 고등어를 내려친 게 아니라 미스리를 내려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최사장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던 고창댁이 생각나 더 이상 입을 다물었다.
의사 선생은 수지 접합수술은 미세현미경을 보며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로 혈관과 신경을 하나하나씩 이어야 하는 초정밀 수술이므로 보통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기계에 눌리거나 으깨진 것이 아니라 칼로 베어 깨끗하게 잘린 경우라 상대적으로 빠르게 끝나겠지만, 혈액순환이 잘 되는지 손가락 색깔, 온도 등을 24시간 지켜봐야 하므로 중환자실이나 집중관찰실에 입원하여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퇴원 후에도 손가락 기능을 되살리기 위한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근디 질로 걱정되는 것이 수술비여. 월매나 나올랑가?”
곰소댁은 아까부터 수술비 걱정에 애가 탔다.
“아따 지금 그게 문제여? 사람이 먼첨 살고 봐야제. 쓰잘 데기 없는 생각일랑 말고 어서 회복이나 혀.”
다행스럽게도 곰소댁의 수술은 잘 되어서 흉터만 남을 뿐이지 손가락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병원 복도의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곰소댁은 마취가 풀리며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뭉툭하게 감긴 붕대 뭉치 속에서 방금 이어 붙인 손가락이 제 존재를 알리듯 맥박을 쳤지만, 그 박동은 기쁨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무게로 그녀를 눌러왔다.
“이게 도대체 얼마짜리 손꾸락인 거여?”
갈라진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낮에 원무과 직원이 넌지시 일러준 예상 수술비는 곰소댁이 영등포 시장 골목에서 젓갈 통을 수천 번 옮겨야 만질 수 있는 거금이었다.
옆 침대 여자의 서랍장 위에는 하늘색 테두리가 둘러진 빳빳한 수첩 하나가 놓여 있었다. '피보험자증'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그 수첩은 곰소댁에게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양반집의 교지(敎旨)처럼 보였다. 여자의 남편은 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나라에서 병원비를 다 내주니 세상 참 좋아졌지?”
그녀는 면회를 온 친척에게 올해부터 공무원들도 보험 혜택을 받게 되었다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자랑했다, 그 웃음소리는 곰소댁의 가슴에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되어 박혔다.
‘누구는 나라 지키는 나랏일 헌다고 손톱 밑 가시만 박혀도 나랏돈으로 고치고, 누구는 시장 바닥에서 손꾸락이 잘려 나가도 제 살 깎아 메워야 하는거여?’
곰소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시커먼 하늘을 보았다. 그녀가 아는 법이라곤 시장 통제 구역에 좌판을 깔면 단속반이 달려온다는 것과, 돈을 빌리면 제 날짜에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한다는 비정한 생존의 법칙뿐이었다. 국가가 아픈 국민을 돌봐준다는 그 '의료보험'이라는 법은 적어도 영등포 시장 골목의 비린내 속까지는 스며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옆 침대 여자가 간호사를 불러 상냥하게 드레싱을 요구할 때, 곰소댁은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이불 밑으로 깊숙이 숨겼다. 혹시라도 간호사와 눈이 마주칠까 봐서 겁이 났다. 눈이 마주치면 또 돈이 드는 처치를 할까 봐, 항생제 한 알을 더 먹으라고 할까 봐, 그게 다 굴비 한 두름 값이고 소금 한 가마니 값이라는 생각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같은 병실, 같은 높이의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옆 침대 여자가 덮은 이불은 국가가 보장하는 안락한 보호막이었고 곰소댁이 덮은 이불은 조만간 병원비 독촉장에 찢겨나갈 얇은 홑이불에 불과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놈의 손꾸락, 보험증 있는 집 귀신이 가져가 버리지 왜 나한테 붙어 있는 거여?”
곰소댁은 붕대 감긴 손을 들어 올려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고, 이었으나 끊어진 것보다 못한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1979년의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는데, 곰소댁의 시간은 그 성장의 불빛이 닿지 않는 병실 구석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영등포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의료보험증이라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이 있는 자들에게는 이 병원이 안식처일지 몰라도, 보험 없는 곰소댁에게는 매시간 병실료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다.
그녀는 퉁퉁 부어오른 손보다, 숙희와 좌판이 더 아려왔다. 곰소댁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소금기에 절어 하얗게 일어난 자신의 고무장화와, 그 속에 갇혀 평생을 눅눅하게 살아온 고단한 세월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그냥 잘린 채로 살 것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귀한 수술을 덥석 받아부렀을까이.”
갑자기 자기를 병원으로 데려온 최사장이 원망스러웠다.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던 사람이 지금은 원수처럼 여겨지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창틈으로 스며드는 1979년의 겨울바람이 살을 에듯 차가웠다. 곰소댁은 살아난 손가락의 감각이 무서워, 온기 없는 병원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정희는 곰소댁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영석이와 함께 숙희를 데리고 성애병원을 찾았다.
오랜만에 보는 숙희 모습에 곰소댁은 엉엉 울었다.
“아줌마! 너무 걱정 마셔요. 숙희는 우리가 잘 데리고 있으니까요.”
“엄마! 많이 아프지?”
숙희도 제 엄마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아녀. 이제 하나도 안 아픙게 아무 걱정을 허들 말어. 손꾸락이 기적처럼 붙어번졌응게 말이여,”
“엄마. 그럼 손가락 움직일 수도 있어?”
“당연허지. 근디 재활치료를 해야 헌다드라.”
“근디 두 사람 우리 숙희 챙기느라 고생이 많지? 어쩌코롬 은혜를 갚는디야?”
“아이고 아줌마 별소리를 다 하시네요.”
“영석이가 학교 수업 마치는 대로 달려와서 챙기고, 아침, 저녁은 제가 챙기니 아무 걱정 마시고 어서 빨리 나아서 퇴원이나 하세요.”
“근디 나 퇴원 못허고 여그서 죽어야 할지도 몰러. 치료비 못 내면 병원 귀신 된다는디?”
“그런 걱정 마세요. 최사장님하고 시장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았대요. 최사장님이 절반을 내고, 나머지 절반은 성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니 어서 퇴원하셔서 열심히 벌어서 갚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제가 조금 넣었어요.”
“워메! 이것이 뭐당가?”
“그동안 아줌마가 우리한테 베풀어 주신 은혜는 다 갚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세요.”
곰소댁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링거상태를 보러 왔던 간호사가 박수를 쳤다.
“고마워.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등만 딱 맞는 말일세. 제 배 부르면 종 배고픈 줄 모르고 가난은 가난한 사람이 질로 잘 안다등만. 내 이 은혜 평생 안 잊고 갚을 팅게 그리 알어. 염치없지만 지금 내 형편이 이 모냥이니 받아둠세.”
오늘은 마침 일요일이라 정희는 숙희를 데리고 오목교로 가고 영석은 수아를 만나러 남영역으로 갔다. 수아는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수혁이 형님 소식 들은 게 있나?”
“엄마랑 혹시 면회가 되나 싶어 부대를 찾아갔다가 면박만 당하고 돌아왔어.”
태종이 말에 따르면 10.26 사건 이후 군대 내의 서신 검열을 포함한 전반적인 통제가 강력하게 강화되었다고 한다. 비상계엄 아래서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에 따라 언론, 출판, 집회는 물론 우편물에 대한 검열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한다. 따라서 병사들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나 밖에서 영내로 들어오는 서신에 대한 검열은 보안 유출 방지라는 명목 아래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단순히 편지를 읽어보는 수준을 넘어 정치적 비판이나 군 내부 사정 발설 등 불온한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낸 장병은 처벌이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그러므로 편지를 쓸 때 상급자가 내용을 다 읽어본 후에 봉인하고, 가족에게 군대 내부 상황을 한 글자라도 적으면 즉시 문제가 된다고 한다.
“우리 오빠는 다른 장병들과 다르잖아. 강제 징집병이라 더 걱정이야.”
수아는 거의 울상이었다. 영석은 수아 옆으로 가 수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혁이 형님은 잘 해낼 거야.”
“아냐. 우리 둘째 오빠는 큰오빠와는 결이 달라. 정의 관념에 대한 결벽증이 매우 강하고,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치받는 성격이 있어. 게다가 마음은 너무 여리거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누가 옥죄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해. 그래서 이런 시국에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하는 거야.”
“우리 나가서 소주나 한잔 마실까?”
영석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이 음울한 분위기를 깰만한 것은 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석과 수아는 숙대 부근으로 적당한 술집을 찾아 나섰다.
숙대 입구 골목의 ‘이리 오너라’는 이름만큼이나 호기로운 해방구다. 육중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면, 대학생들의 젖은 신발에서 묻어난 흙먼지와 막걸리의 시큼한 향이 뒤섞여 묘한 활기를 만들어낸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가 탁자마다 놓이고 주모의 거친 손길로 부쳐낸 파전이 상 위에 오르면, 학생들은 비로소 억눌렸던 목소리를 높인다.
그 길목 끝자락의 ‘황해집’ 역시 허기진 청춘들의 성지다. 유독 국물 맛이 깊은 그곳에서 학생들은 낡은 냄비를 사이에 두고 시국을 논한다.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도망치듯 들어온 이들에게 주인아주머니는 말없이 뜨거운 국물을 넉넉히 내어주곤 한다. 칠이 벗겨진 벽면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낙서처럼 새겨져 있고, 학생들은 그곳의 고기 한 점과 술 한 잔에 기대어 내일의 불안을 잠시 잊는다.
남영동 거리의 다방 ‘다사랑’은 이 시대 대학생들에게는 가장 우아한 피난처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으면 DJ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Simon & Garfunkel의 노래가 귀를 간질인다. 누군가는 소개팅 여학생을 기다리며 연신 손목시계를 살피고, 다른 누군가는 가방 깊숙이 숨겨온 유인물을 테이블 아래로 은밀히 건넨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 한 잔이 식어가는 동안에도 ‘다사랑’의 뮤직박스는 멈추지 않고, 그곳의 공기는 늘 달콤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장하다.
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할 수 있는 ‘미소다’는 이름처럼 정겨운 휴식처다. ‘미소다’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남영동 대로를 바쁘게 지나가는 행인들과 군용 트럭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시시콜콜한 학점 이야기부터 시작해, 읽지 못한 금서의 뒷이야기를 속삭이듯 나누곤 한다. 1979년의 가을, 서슬 퍼런 긴장감이 서울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미소다’의 노란 조명 아래서만큼은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찻잔의 온기처럼 잔잔하게 번져 나간다.
숙대입구역과 가까운 서부역은 가난한 고시생들이나 대학생들이 값싸게 소주와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특히 10.26 사건 이후 계엄 상황에서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골목 안쪽 대폿집에서 숨죽여 술을 마시는 풍경이 흔하다. 숙대 입구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청파동 골목길과 남영동 일대에는 막걸리를 파는 학사주점들이 즐비하다. 특히 남영동은 미군 부대의 영향으로 스테이크집이나 부대찌개집과 한국적인 대폿집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리 오너라’에 가서 꿀막걸리와 파전 그리고 도토리묵을 먹을 것인지, 아니면 ‘황해집’에 가서 황해스테이크나 부대찌개를 먹을 것인지 둘 중에서 골라 봐”
“나는 ‘황해집’ 가고 싶어.”
‘황해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접시에 담긴 서양식 스테이크가 아니라 미군 부대에서 나온 안심이나 등심, 햄, 소시지, 베이컨을 주재료로 한 남영동식 모둠 스테이크가 나오는 집이다. 커다란 철판 위에 은박지를 깔고, 고기와 가공육을 양파, 감자, 버섯 등과 함께 볶듯이 구워 먹는다. 버터를 넉넉히 둘러 고소한 향이 진동하며, 여기에 마법가루라고 불리는 조미료와 후추를 쳐서 맛을 내며, 찍어먹는 소스로는 케첩이나 머스터드가 나온다. 스테이크를 먹고 느끼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대찌개를 주문해야 한다. 그리고 ‘부대찌개’라는 말 대신 ‘부대고기’ 또는 ‘섞어찌개’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황해집’에 들어서니 지글거리는 철판 위의 버터향은 허기를 자극하지만, 식당 안 TV에서 흘러나오는 계엄 소식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낡은 여닫이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찬바람이 들이쳤다. 가게 안은 찌개 끓는 냄새와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잔을 부딪치며 박정희의 죽음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안주 삼아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구석 선반 위에 놓인 낡은 금성 텔레비전에서 ‘수사 결과 발표’라는 자막이 뜨자,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깍두기를 씹던 사내의 턱이 멈췄고, 막걸리를 따르던 주모의 손길도 그대로 굳었다.
화면 속에는 생소한 얼굴이 서 있었다. 육군 소장 전두환. 황해집 손님들에게 익숙한 군인의 이미지는 인자한 아버지 같거나 혹은 엄격한 스승 같은 모습이었지만, 화면 속의 남자는 달랐다. 흑백 화면 속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대머리에 눈빛은 번들거렸고, 입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김재규는 대권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의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뚫고 술집 안을 휘저었다. 그 소리는 술기운을 단숨에 깨울 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제껏 알던 세상이 끝났고,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누군가 나지막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텔레비전 빛에 비친 술꾼들의 얼굴에는 기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황해집’ 주인장은 애꿎은 행주로 탁자만 닦아댔다.
전두환이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황해집’의 손님들은 마치 그 눈빛이 자신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왁자지껄하던 대폿집은 순식간에 취조실처럼 서늘해졌다.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들이켰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건 술이 아니라 형체 없는 두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