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차가운 북서풍이 거리를 훑고 지나갔다. 겨울비가 채 마르지 않은 골목길은 희끄무레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얼음 냄새를 품고 있다. 사람들이 코트를 움켜쥐고 종각역 부근의 버스정류장에 줄을 섰지만, 대화는 거의 없다. 그저 신문 1면의 굵은 제목들 ‘비상계엄 확대’, ‘정국 수습 논의’가 모든 대화를 대신하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명동의 네온사인은 화려한 불빛을 내고 있지만, 어딘가 주춤거리고 있다. 상점 안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어색하게 걸려 있고, 라디오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폭설 주의보’를 알리며, 버스 사이로 간간이 군용 트럭의 엔진소리도 들린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는 하지만 대놓고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그저 말없이 신문을 접고, 커피잔을 내려놓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아까부터 눈발이 한두 송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한강의 물결은 무겁게 흐른다. 강변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는 안갯속에서 길게 퍼지며 흐릿한 금빛 선이 되고 있다. 누군가 “곧 새해가 올 텐데”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는 새해의 설렘보다도 더 짙은 망설임이 배어 있다. 도시 전체가 한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오래도록 이어진 권력의 그림자와 새로운 불안이 한데 뒤섞인, 1979년 12월의 서울이다.
영석은 기말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중앙도서관 2층에 자리를 잡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나왔지만 자리 잡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수아가 남산도서관 자리를 잡아주던 일이 아련하다. 그래도 오늘은 창가는 아니지만 자리를 잡아 자리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리저리 옮겨 다니거나 조개탄 난로를 때는 빈 강의실에 가지 않아도 된다.
12월의 냉기가 교정 구석구석에 남아있는데, 성균관대학교라는 교명은 겉으로는 여전히 전통과 권위를 두르고 있으나, 속으로는 재단 교체와 권력의 눈치를 보는 불안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오래전부터 학교를 떠받쳐 온 삼성 재단은, 수원 캠퍼스 조성 문제와 학과 이전을 둘러싼 갈등이 격렬해지자 더 이상 이곳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고, 그 빈자리를 곧 봉명그룹의 이름을 단 학교법인이 차지했다. 학생과 교수, 유림까지 뒤엉켜 목소리를 높이던 그 몇 해 사이, 교정 위로는 눈이 내렸다가 녹기를 반복했지만, 학교는 발전이 멈추고 퇴보하는 모습이다.
박정희 정권의 그림자는 그 과정 전체를 느릿하게, 그러나 분명히 드리우고 있다. 관선 이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국가’와 ‘안정’을 입에 달고 다니고, 재단 교체는 어디까지나 ‘학교의 정상화’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복도를 지나는 교직원과 교수들, 강의실에서 속삭이는 학생들은 누가 실제로 이 판을 짜고 있는지, 어느 선에서 보이지 않는 승인과 고개의 끄덕임이 오갔는지, 그 대답이 청와대 쪽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공식 문서 어디에도 ‘지시’라는 두 글자는 남지 않았고, 오직 분위기와 암묵의 합의만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강의실 안은 더 을씨년스럽다. 큼지막한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는 기름이 아니라 조개탄 냄새였고, 그 조개탄은 봉명그룹이 소유한 탄광에서 캐 올린 것이라는 무성한 소문이 학교 발전을 바라는 학생들의 마음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연탄보다 조금은 거칠고, 숯보다 조금은 눅진한 냄새가 학생들의 외투와 머리카락에 가득히 배고, 검은 칠판 위에 분필 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칠판과 난로 사이를 오가는 공기 속에는 탄 냄새와 분진이 뒤섞여 엷은 안개처럼 떠돌았다. 후기 명문이라는 자부심은 겨울 하늘 진눈깨비가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듯 사라진 지 오래다.
영석은 정성근 교수의 형법총론 강의 노트를 펼쳤으나 내용이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범죄 구성요건은 법률이 규정한 객관적·주관적 요소로 여기에는 구성요건 해당성, 고의·과실, 위법성이 포함되며, 이를 충족해야 범죄 논의가 시작된다.”, “위법성은 구성요건을 충족한 행위가 법질서에 반하는지 그 여부를 검토하며, 정당행위나 긴급피난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책임은 행위자의 책임능력을 통해 판단된다.”
죄형법정주의, 법률주의, 불소급, 공범, 교사, 방조, 종범, 미수범, 불능미수 등등 교수의 설명 내용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용어들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얼어붙은 듯 도대체 머릿속에서 해동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태종이가 와룡동 쪽으로 내려가는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태종이가 어쩐 일로 도서관에 나와서 공부를 다 하는가?”
“졸업하려면 학사경고는 면해야 하지 않겠니?”
“이렇게 음울한 날은 주점에 앉아 독한 쐬주 한잔해야 제격인데 말이야.”
태종이 말을 듣고 보니 영석이도 소주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태종이의 ‘쐬주‘라는 단어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들이 된소리와 센소리를 더 자주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태종아,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보다. 저기 봐라, 학생들 표정부터 다르지 않니? 유신이 끝났으니 이제 우리도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해보는 거야?”
영석의 들뜬 목소리와 달리, 태종이는 멀리 보이는 명륜당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태종은 가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시간의 틈새를 읽어내곤 했다. 그의 눈에는 지금 청명한 겨울 하늘 대신, 거대한 군화 발자국이 종로 거리를 짓밟고 지나가는 환영이 일렁이고 있었다.
“영석아, 봄은 아직 멀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 겨울은 아주 길고 시릴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박통이 갔는데. 이제 모두 다 끝난 거 아니었어?”
태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하늘에 해가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밤이 짧은 건 아니야. 그림자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사나운 짐승들이 자기들끼리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서빙고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비리다.”
“비리다니?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야?, 서빙고는 또 무슨 말이야?”
“난 TV에 나오는 전두환이란 인물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권력욕이 피비린내를 풍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그의 목소리에는 모든 게 묻어 나와. 제발 내 예감이 틀리고, 네 말대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시험 끝나거든 일찍 집에 들어가라.”
태종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영석은 까닭 모를 소름이 돋아 제 팔을 문질렀다. 평소 태종의 예언 같은 소리가 ‘도사님 말씀’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태종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농담조차 나오지 않았다.
“남녘에서 올라온 찬 바람이 서부전선을 타고 내려와 청와대 뒷길을 적실 지도 몰라. 군인들이 총구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 영석아, 우리가 꿈꾸고 있는 ‘서울의 봄’은 피 냄새 섞인 눈보라에 묻혀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박통을 잃은 지지자들은 그것을 더 바랄지도 몰라.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개념보다 보릿고개를 이기게 해 주었고, 산골을 번화한 도시로 만들어준 또 다른 영웅을 고대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들은 몇십 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을 거야.”
태종은 말을 마치고 먼 산을 보듯 남쪽 하늘을 응시했다. 1979년 12월, 성균관대학교 고정의 공기는 그랬다.
“영석아! 그런데 이제 너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고 있기에는 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시간이 올 거야. 그때는 너도 도서관 문을 박차고 정의를 외치는 투사의 모습을 보일지도 몰라.”
영석은 오늘같이 우울한 날 수아를 보고 싶었지만, 기말고사 기간에는 만나지 않기로 했기에 참기로 했다.
“태종아. 점심은 먹어야 하지 않겠니?”
“그럴까? 뭘 먹지?”
“와룡동에 가서 백반 먹는 건 어떨까?”
그들은 중앙도서관을 오른쪽에 두고 좁은 길을 내려와 와룡동의 허름한 백반집을 찾아 들어갔다.
“할머니! ‘계란프라이’ 하나 더 해줄 수 없어요? 배고파요.”
멸치와 배추를 넣고 끓인 구수한 된장국과 갓 담은 배추겉절이, 어묵무침, 깻잎장아찌, 작지만 실한 굴비구이 한 마리, 오이무침이 곁들여 나온 백반은 꿀맛이었다. 그런데 백반 위에 놓인 ‘계란프라이’ 하나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한창 먹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계란프라이’ 하나는 로망이다. 그러나 영석은 ‘달걀프라이’도 아닌 ‘달걀부침’이 우리말에 더 가까운 표현이 아닐까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않고 그저 참기로 했다.
“옛다 하나 더 먹어라. 이놈아,”
“할머니 고맙습니다.”
“밥은 밥통 속에서 네 맘대로 퍼다 먹어.”
민우는 정희와 마지막 만난 날 이후에도 이틀 동안 더 출근했다. 그리고 정희는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정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관리부장이 정희에게 자신을 눈여겨보라고 한 날 회사를 그만둘 경우, 정희가 의심받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관리부장이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위험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이틀이 되는 날 완전히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회사를 떠나기 전에 사직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수아는 오전에 수혁이 오빠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편지를 개봉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수아야!
네 편지 잘 받았다. 부모님이나 너도 모두 건강하다고 하니 안심이다.
부대 일과는 여전. 기상-점호-훈련-점호-취침. 매일 같다. 최근 점호 때마다, 점호를 받는 사람 뒤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내 착각일지 모른다. 그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데, 그냥 인사만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 낯선 사람이 싫기 때문이다.
요즘은 책을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은 훈련 중에 훈련소 동기라며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데 내 동기라고 했다. 내 머리도 이제 늙어가나 보다.
집은 어떠냐? 엄마 기침은 나아졌니?
길게 쓰지 못하는 점 이해해라. 오빠는 잘 있다.
잘 있거라.
1979년 12월 3일
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오빠 씀
편지를 펼친 순간, 수아는 오빠의 필체가 여전함에 안도하다가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과 “갑자기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했다” 같은 낯선 표현에 멈칫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오빠는 군 생활이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라면서도 가끔 농담도 하고 자신의 군 생활 중에 생기는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써 보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편지 내용이 매우 짧고 낯 모르는 동기의 출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게 이상했다. 그리고 점호를 받는 사람 중에 낯선 사람이 섞여 있다는 표현도 심상치 않았다. 수아는 누구보다 둘째 오빠의 심리상태를 읽는 데 능숙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할 말, 못할 말 다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수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오빠가 무언가를 숨기려 애쓰는 듯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수아는 편지를 몇 번씩 다시 읽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곱씹어 보았다. “그 사람이 말을 걸지만, 그냥 인사만 나누려고 노력한다. 낯선 사람이 싫기 때문이다.”, “훈련 중에 훈련소 동기라며 전혀 낯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데 내 동기라고 했다. 내 머리도 이제 늙어가나 보다."라는 말투가 오빠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말로 못 할 긴장감이 숨겨져 있음을 읽었다. 그리고 10.26 사건 이후 뉴스에서 들은 군 내부의 혼란과 검열 소문이 떠오르며, 오빠가 감시당하거나 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두려움이 커졌다. 수아는 편지를 다시 읽을 때마다 손이 떨려 편지를 놓치기 일쑤였고, 엄마에게 말할까를 고민했지만, 오빠의 “오빠는 잘 있다.”라는 마무리에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아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오빠를 지키고 싶은 보호 본능과 무력감이 뒤엉켰다. 서울대 심리학과를 다니던 오빠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이 편지 속에 압축돼 있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조용히 울음을 삼키며 답장을 준비했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에게
오빠, 편지 잘 받았어. 오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 건강하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야. 오빠가 멀리서도 이렇게 소식을 전해주니, 내가 더 힘을 내게 되는 것 같아.
반복적인 부대 생활에 오빠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돼. 매일 점호 때마다 피곤한 몸으로 서 있을 텐데, 그 속에서 오빠가 버티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섞여 있다고 했지? 군대가 그렇다 치고, 오빠처럼 똑똑한 사람이니까 주변을 잘 지켜보겠지. 갑자기 나타난 동기분이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니, 오빠 마음이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오빠가 “별일 아니다”라고 하니, 나도 오빠를 믿어. 오빠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잖아. 나이가 들어서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빠가 관심을 덜 가졌던 사람이기에 생각이 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오빠는 재미있는 일에는 한없이 집중하지만 재미없는 일에는 무관심 그 자체잖아. 나는 오빠를 전혀 걱정하지 않아. 오빠는 항상 강하니까. 그래도 오빠, 무슨 일이든 혼자 끙끙 앓지 말아. 항상 그랬듯이 이 동생한테 털어놓아 봐. 혹시 알아? 그 고민을 내가 해결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오늘따라 오빠랑 신림동 순대 시장 골목에서 먹던 순대볶음 생각이 나네. 어서 제대해서 우리 또 거기 가서 순댓국도 먹어보자. 그리고 지난번에 보여준 우리 삼춘도 잘 있어. 같이 오빠 면회 가고 싶은데 면회가 안 된다고 해서 삼춘이 아주 실망하고 있어.
아빠, 엄마는 무탈하시고, 이 동생이 잘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일랑 부대 내의 개에게나 줘버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오빠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할 날이 곧 올 거야. 그리고 오빠의 통찰력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어. 엄마는 오빠 편지 읽으신 후, “수혁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웃으시더라고. 집은 평소처럼 조용하지만, 오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오빠! 10월 그 일 이후로 세상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 뉴스에서만 봐도 불안한데, 오빠는 그 한가운데서 얼마나 더 힘들까. 하지만 오빠는 내 영웅이야. 어린 시절부터 오빠가 손잡아주던 그 손길이 아직도 느껴져. 비 오는 날, 나한테는 우산 씌워주고 자기는 우산 없이 집에 가던 오빠, 추운 겨울에 외투 벗어주던 오빠. 그 오빠가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너무나 잘 알아. 나도 오빠를 지키고 싶어. 오빠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매일 기도할게.
오빠, 제발 몸조리 잘해야 돼. 따뜻한 물 자주 마시고, 훈련 끝나면 푹 쉬어.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는 오빠의 웃는 얼굴이 그려지기를 바랄게. 난 오빠 없이는 아무것도 안 돼. 사랑해, 오빠.
영원한 오빠의 여동생 수아가
1979년. 12월 3일 밤.
수아는 평소와 달리 건조하기 짝이 없는 오빠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더 자세하고 긴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영석이가 부대에서 서신 검열할 거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서 그나마 짧게 마무리해서 답장을 보냈다.
숙희는 엄마 없는 밤을 정희의 품속에서 보냈다. 언니에게서는 엄마의 비릿한 냄새가 아니라 학교 화단에서 맡은 잘 익은 배나 복숭아 같은 프리지어 꽃냄새가 났고, 그것은 깨끗한 화장비누 향 같았다. 그래서 춥다는 핑계로 자꾸 언니 품을 파고들었다.
“숙희야. 어서 학교 갈 준비 해야지. 얼른 일어나 씻고 밥 먹자.”
정희는 출근하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 밥을 했다. 그리고 숙희 도시락을 준비했다. 혹시라도 엄마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다. 그래서 비싼 햄을 사서 프라이팬에 굽기도 하고, 달걀을 부쳐 도시락밥 위에 올리기도 했다.
이런 정희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숙희는 정희가 깨우면 빨딱 일어나 세수하고 자기 스스로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오빠! 오늘도 학교 가는 거야?”
“당연하지. 오빠 기말고사 기간이잖아.”
“언제 집으로 오는데?”
“우리 숙희 기다리니까 최대한 빨리 올 거야.”
“오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무서워 아무도 없어서.”
“오빠가 데리러 갈 때까지 ‘복음자리 교회’에서 기다려. 절대 혼자 집에 와 있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곰소댁은 아침부터 심란했다. 최 사장과 시장 사람들이 자신의 치료비를 모았다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창댁과 최 사장이 퇴원을 돕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병원을 찾아왔다.
“내가 손꾸락 하나 수술했을 뿐 사지가 멀쩡헌디 아적부터 이게 뭔 일이 당가?”
“아따 ‘아침’을 굳이 ‘아적’이라고 허는거 본께 전라도 사람이 확실히 맞구만.”
고창댁이 활짝 웃으며 곰소댁의 환자복을 벗기며 말했다.
“아따 저짝 보쇼. 여자가 옷을 갈아입는디 남정네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코롬 옷을 갈아입는다요.”
고창댁의 지청구에 최 사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근디 치료비가 솔찬히 많이 나왔을 틴디 어쩐디야?”
곰소댁이 울상을 지었다.
“걱정을 허덜 말어 최 사장이 모다 해결했응게.”
고창댁이 곰소댁의 어깨를 치며 하는 말이다.
“뭔 소리여! 시장 상인들이 십시일반 도와준 것이 태반인디.”
최 사장이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한마디를 했다.
“그랴도 최 사장이 집을 담보로 잽히지 않았으먼 곰소댁 병원 귀신 될 뻔 한 건 곰소댁도 알아야제.”
고창댁은 곰소댁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숙희가 학교에 도착하니 선희가 다가와서 물었다.
“숙희야. 엄마는 어떠셔?”
“응. 오늘 퇴원하신다고 했어.”
“오늘이 12월 11일이니까 거의 2주일간이나 입원하신 거네. 오늘 나랑 시장에 가서 너희 엄마 좀 뵐 수 있어?”
“그렇고 말고. 너만 시간이 있다면.”
“그래. 오늘 순대국밥도 먹고 싶어. 오늘은 내가 돈을 내고 당당하게 먹을 거야. 네 엄마께도 퇴원 기념으로 사드릴 거야.”
“너 돈 많아?”
숙희는 순대국밥 가격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비쌀 것 같은데 선희가 낸다니 놀라서 물었다.
“숙희야. 나 그 정도의 돈은 있어.”
선희는 숙희의 손을 잡고 영등포 시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는디야?”
곰소댁은 평소의 여장부다움은 어디 가고 한없이 여린 여자의 모습으로 말했다.
“아따! 같이 살아 불면 되는 것이제. 그라믄 그 돈이 그 돈 아녀?”
고창댁이 키득키득 웃으며 한마디를 했다.
“째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 아녀.”
곰소댁은 고창댁의 입을 닫아야겠다 싶었다. 최 사장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시장에 세 사람이 들어서자, 시장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워메 이를 어쩐당가. 그저 감사 헙니다요. 두고두고 은혜 갚음서 살팅게 이 절 받으쇼.”
곰소댁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시장 상인들은 뜨겁게 환영의 박수를 쳤다.
“엄마!”
숙희가 곰소댁의 품 안을 파고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고! 내 새끼 잘 있었능가?”
곰소댁은 숙희를 껴안으며 숙희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선희도 그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선희야!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어. 그렁게 숙희랑 오래오래 친구 함서 같이 가거라 잉”
“네.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