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수혁의 장례가 끝난 후, 쌍문동 수아네 집의 공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비록 수아네도 지역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일군 집안이었으나, 군법과 국가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들의 재력은 그저 무력한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수아의 아버지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들의 명예와, 돈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관 위의 못질을 보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 무렵, 수아네 집 마당에는 박 회장의 아들이 몰고 온 그라나다(Granada)가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나다는 독일 포드(Ford of Europe)가 개발한 모델이다. 독일 포드는 미국의 포드(Ford) 자동차 회사가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 시장에 맞춰서 만든 ‘크고 기름 많이 먹는’ 차는 유럽의 좁은 도로와 고속 주행(아우토반)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미국 본사가 아닌 독일의 포드 공장에서 만든 ‘탄탄한 주행 성능과 효율성’을 갖춘 차다. 요즘 한국의 부잣집 자제들은 이 그라나다와 대우자동차가 독일 오펠(Opel)의 레코드(Rekord)를 기반으로 만든 로얄 시리즈(Royal Salon)를 타는 것이 유행이다. 물론 부의 상징인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Benz)나 BMW, 크고 화려한 미국차 캐딜락(Cadillac)이나 링컨(Lincoln), 안전의 대명사로 알려져 전문직이나 교수 등 지식인 부유층이 선호하는 볼보(Volvo)도 있지만, 순수 외제 차를 구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외제 차를 타는 것이 ‘사치풍조’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보니 해외 모델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 생산한 차들이 ‘외제 차’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박 회장은 수아 아버지의 오랜 동기이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도 줄이 닿아 있는 종로의 거물이었다. 두 집안의 결합은 오래전부터 오가던 이야기였으나, 수혁의 사고는 그 논의에 기름을 부었다.
“수아 너도 알 거다. 우리 집안이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았어도, 이번 일 겪어보니 권력 앞에서는 풍전등화더구나. 박 회장 댁과 사돈을 맺는 건, 이제 우리 집안을 지키는 유일한 성벽이 될 게다.”
수길의 말은 차가웠다. 수아는 자신의 방 창 너머로 보이는 윤기 흐르는 자동차의 보닛을 내려다보았다. 영석과 함께 도서관 계단에 앉아 나눠 먹던 식은 김밥이 떠올랐지만, 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그 기억을 지워냈다. 가난한 고시생 영석은 수아에게 '사랑'이다. 그러나 박 회장의 아들은 ‘방패’이자 ‘복수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아는 영석을 사랑하기에, 그를 이 진흙탕 싸움에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영석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자, 스스로가 선택한 냉혹한 생존법이었다. 그녀는 수혁의 장례식을 치른 후 훨씬 강해졌다.
한편, 서울로 돌아온 민우는 최 사장의 배려로 그가 살던 신길동 집에 짐을 풀었다. 최 사장은 당분간 민우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부식 거리나 쌀 등은 자신이 들락거리며 사다 주겠다고 말했다.
“여기가 안성맞춤일 것이여. 내가 정희랑 상의해 가면서 여러모로 도울팅게 아무 염려 말고 여그서 살더라고. 내집인디 누가 의심허겄는가?”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월세 낼 돈이 없는데.”
“아따 뭔 소리를 헌당가, 자네 같은 사람을 우리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는 당가? 글고 정희가 우리한테 남이 당가?”
“여그만큼 안전한 곳도 없을 것이여. 나는 좋은 시상 올 때꺼정 숙희네서 살면 되는 거여. 그라고 자네가 자유의 몸이 되면 다시 곰소댁이랑 여그 와서 살면 되는 것이제. 방세 같은 것은 걱정을 허덜 말어,”
민우는 텅 빈 최 사장의 집에서 태종이 물어다 주는 극비 정보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보안사 내부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민우 형, 전두환이가 중정까지 먹은 건 서막에 불과해. 이제 언론 장악하고 나면 그다음은 군대를 움직여 전국을 장악하는 거야. 곧 저들은 분명히 승부수를 던질 거야.”
태종의 경고는 비수가 되어 민우의 가슴에 꽂혔다.
영석의 사정은 처참했다. 교수의 꿈을 접고 사법시험에 매달리기로 했으나, 당장 생계가 발목을 잡았다. 수아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수혁의 수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법의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지만, 사법고시에 매달리려니 당장 과외를 그만두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영석에게 고액 과외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대학생들에게 ‘과외’는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넘어 신분 상승의 사다리이자, 가난한 인텔리들이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적 보루다. 특히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 시기에 강남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고액 과외’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선망과 비애가 교차하는 기묘한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영석에게 강남행 버스는 매주 두 번, 자존심을 꺾고 현실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유람선과 같다. 한남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한강 너머의 고층 아파트 단지들은 마치 딴 세상의 요새와 같기 때문이다.
1980년의 봄, 대학 가는 계엄 해제를 외치는 구호로 뜨겁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하숙비와 책값에 허덕이는 학생들에게는 ‘서울역 앞의 격전’보다 ‘강남 아파트의 초인종’이 더 절박한 현실이다. 영석이 과외하러 다니는 도곡동과 청담동의 아파트 거실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내오는 쟁반 위에는 학교 식당에서는 구경도 못 할 귀한 수입 과일들이 놓여 있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내성적인 영석에게 학부모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은 최상의 조건이다.
영석이 도곡동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갓 볶은 헤이즐넛 커피 향과 고가의 수입 가구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나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거실 한복판, 벨벳 소파에 정좌하듯 앉아 있던 정우 어머니는 영석이 들어오자마자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유행하는 화려한 원피스 위에 보드라운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가늘게 뻗은 목선 위로 진주 목걸이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어서 와요, 선생님. 오느라 고생 많았죠? 밤 기온이 제법 쌀쌀하죠?”
말투는 다정했으나, 그녀의 눈빛은 영석의 구겨진 셔츠 깃과 약간 닳아버린 구두 뒷굽을 매서운 정찰병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내 자식을 가르칠 스승’에 대한 예우라기보다, ‘비싼 값을 치르고 들인 고급 가전제품’의 상태를 확인하는 소비자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녀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가져온 크리스털 잔에 오렌지 주스를 채워 영석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주스 안에는 살얼음이 띄워져 있었고, 옆에 놓인 접시에는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미제 초콜릿이 놓였다. 영석은 처음 보는 정우 어머니가 너무나 어렵고, 마치 월급 주는 사장님의 호출을 받은 것 같아서 눈을 어디에 둘 줄 모르고 허둥댔다.
“선생님, 우리 정우 전국에 있는 어느 대학교든지 법대만 보내주세요. 절대 선생님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아!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영석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탁자 밑에만 머물러 있었다.
“요즘 밖이 어수선하죠? 서울역이다 어디다 해서 학생들 시위가 한창이라던데. 우리 영석 선생님은 그런 데 한눈팔지 말고 공부랑 과외에만 전념해 줘요. 귀한 재능을 길바닥 최루탄 가루 묻히는 데 쓰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렇죠?”
나긋나긋한 권유였으나, 그것은 영석의 발목을 이 화려한 거실에 묶어두려는 부드러운 구속이었다. 그녀가 내미는 하얀 돈봉투가 두둑해 보였다. 항상 일하는 아주머니가 돈봉투를 줬었는데 오늘따라 정우 어머니가 직접 주니 한없이 민망했다.
영석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지만, 속이 타는 듯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청담동 과외하는 아이 집에 서있던 로얄살롱의 그 차가운 금속성 광택이, 현우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서도 똑같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우리 아들 공부 못하는 것 너무 잘 알아요. 자기 엄마 아빠 닮았으면 저럴 리가 없는데 누굴 닮았는지 몰라. 합격만 하면 보너스도 넉넉히 챙겨드릴게요.”
“엄마! 오빠는 안돼. 전교 꼴찌에서 세 번 째라니까?”
정우에게는 여동생이 둘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여고 1학년이고, 둘째는 여중 1학년 생인데, 그중 첫째가 어느새 나타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얘가 공부는 하지 않고 왜 나타나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말은 바로 해야지. 오빠가 갈만한 4년제 대학교는 전국에 어디에도 없어. 전문대학도 가능할까?”
“안녕하세요? 저는 혜원이라고 해요.”
“우리 오빠 곧 올 거예요. 우리 오빠 성적 올리려면 힘 좀 들 텐데.”
“얘, 너는 어서 네 방에 가서 공부해. 너는 뭐 얼마나 잘하니?”
“엄마! 나는 바이올린만 잘하면 되는 거라며.”
“다녀왔습니다.”
정우가 딱 맞게 들어왔기 망정이지 영석은 두 여자 사이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정우 어머니의 그 다정한 목소리는 영석의 귀에 달콤한 유혹이자 서글픈 낙인으로 들렸다. 한 달 과외비로 받는 돈은 웬만한 중소기업 직원의 월급과 맞먹었다. 그 돈이면 고향 부모님께 용돈을 부치고도 영석이 사법시험관련 서적을 몽땅 새로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영석의 주머니에 든 두둑한 돈봉투는 늘 무거웠다. 도서관에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민주주의를 논하는 동기들 곁을 지날 때면, 강남 사모님이 주는 그 돈봉투가 마치 비겁함의 대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외를 그만둔다는 건, 단순히 수입이 끊기는 게 아니야. 내 미래를 저당 잡혔던 유일한 생명줄을 끊는 거야. 이를 어떡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영석이가 수아를 만나 커피값도 내고, 밥값, 술값도 내면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과외비 덕택이다. 그런데 사법시험을 준비하려면 이 과외를 먼저 그만두어야 한다. 영석은 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정우야. 반에서 석차가 몇 등 정도니?”
영석은 혜원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 정우에게 물었다.
“선생님. 솔직히 말해서 저 공부 못해요. 반에서 몇 등이 아니라 전교에서 거의 꼴찌였어요.”
“4년제 대학 간다는 건 상상도 안 하고 있어요. 다만 엄마 아빠가 하도 성화를 대니 과외를 받고 있는 거라구요. 저를 가르친 선생님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지쳐서 모두 떠나버려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오래 버티신 겁니다. 그리고 제 성적이 조금 올랐어요. 그래서 울 엄마가 선생님을 저렇게 신뢰하는 거예요. 저 선생님과 과외 시작한 후 1년이 넘었고, 이제 700등 대에서 600등 대 중반까지 치고 올라왔어요. 저도 어리둥절해요.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까 공부가 살짝 재미있어졌거든요.”
“다행이다. 그런데 네 어머니께서 왜 너를 법대에 진학시키려고 저러시는 거니?”
영석의 질문에 정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펜 끝을 만지작거렸다. 화려한 도곡동 아파트의 공기가 정우의 한숨에 실려 무겁게 내려앉았다.
“선생님, 그게 저희 엄마 아빠의 콤플렉스거든요.”
정우가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수학의 정석’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인천에서 동파이프를 생산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런데 늘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돈은 칼보다 힘이 세지만, 법은 그 칼을 쥔 손목을 비트는 법’이라고요. 사업하면서 법 몰라 당한 설움이 한이 맺히신 거죠. 아버지는 판검사 아들 하나 두면 집안 대대로 방패막이가 생기는 거라고 믿고 계세요.”
정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강남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동창회 나가면 다들 남편이 뭐 하는지, 자식이 어느 대학 갔는지가 계급장이잖아요. 얼마나 부자로 사느냐보다, 아들이 법대 다니느냐가 훨씬 센 무기라니까요. 저는 그 두 분의 전신 갑주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속은 텅 빈 깡통인데 겉만 번지르르한 황금 갑옷요.”
영석은 정우의 눈에서 수혁의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기괴한 ‘못질’의 흔적을 보았다. 수혁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에 의해 못질을 당했다면, 정우는 부모라는 이름의 설계자에 의해 법대라는 틀 속에 못질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님,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다른 선생님들은 제가 못 알아들으면 화를 내거나 비웃었는데, 선생님은 그냥 기다려 주셨잖아요. 제가 전교 600등을 하든 700등을 하든, 선생님 눈에는 제가 그냥 ‘사람’으로 보인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울 엄마한테 나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과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못을 박아 놓았어요. 저 열심히 공부할 테니 좀 도와주세요. 전국 어디라도 좋아요. 울 엄마 꿈대로 법대만 보내주세요.”
정우의 솔직한 고백은 영석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영석은 주머니 속에 든 두둑한 돈봉투의 무게를 다시금 실감했다. 정우의 부모에게 이 돈은 자식의 신분 세탁을 위한 ‘기회비용’이었지만, 영석에게는 이 돈이 있어야만 수아에게 밥을 사고, 등록금을 내고, 시골에 계신 엄마를 모셔 올 수 있다.
“정우야. 네가 열심히 공부해야 네 동생들도 너를 무시하지 않는 거야.”
“왜요? 혜원이가 뭐라고 했어요?”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는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네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라는 거야.”
“알았어요. 열심히 공부할 테니 그만두겠다는 말씀만 말아 주세요. 저는 학교라는 곳에 입학한 후 과외를 안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오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약속해 줘요. 저는 선생님이 좋단 말이에요.”
영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우야, 법대에 가고 안 가고는 나중 문제야. 일단 오늘은 이 문장들부터 이해해 보자. 법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최소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약속된 최소한의 도덕이니까.”
영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우에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과외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이 돈줄이 끊기면 당장 수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자신에 대한 공포가 영석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정우 어머니는 여전히 벨벳 소파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가 일어섰다. 그녀는 신발을 신기 위해 엎드린 영석에게 다시 한번 우아하게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다음 주엔 정우가 좋아하는 갈비 좀 재워둘게요. 저 녀석이 선생님 오는 날만 기다린다니까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 영석의 등 뒤로, 강남의 고층 빌딩들이 거대한 묘비처럼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영석이가 목동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당역, 서울대 입구, 봉천동, 신림동 방면으로 이동해서 남부순환로를 따라 구로공단을 거친 후 목동으로 진입하는 영인운수의 64번 버스를 타야 한다. 영석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창을 통해 전해오는 버스의 엔진 진동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고동 소리처럼 느껴졌다.
주머니 속에 든 돈봉투가 허벅지를 묵직하게 눌러왔다. 정우 어머니의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정우의 절실한 눈빛이 교차하며 영석의 목을 죄어왔다. 이 돈봉투만 있으면 당분간 수아네 집 마당에 서 있는 고급 자동차의 광택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다. 수아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사고, 고향의 어머니에게 돈을 부치며, 서점에서 두꺼운 법학 서적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사법시험’
그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다. 수혁의 관 위에 못질을 했던 그 무도한 권력의 맨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증이다. 하지만 그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하루 열네 시간 이상을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한다. 도곡동까지 오가는 왕복 세 시간, 그리고 정우를 가르치는 시간과 수업 준비까지 합치면 일주일 중 사흘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법전의 문구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지금, 과외는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아니라 영석의 발목을 붙잡는 화려한 쇠사슬인 셈이다.
‘그만둬야 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저 화려한 거실의 구경꾼으로 남게 될 거야.’
이성이 차갑게 경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독한 현실감이 옆구리를 찔렀다. 과외를 그만두는 순간, 수아와의 데이트는 사치가 될 것이고, 홍성집 할머니에게 맡긴 학생증과 세이코 손목시계도 찾을 수 없고, 할머니의 눈을 피해 학교 정문 앞을 우회해서 다녀야 한다. 무엇보다 수아에게 ‘나 고시 공부하느라 이제 돈 한 푼 없다’는 말을 내뱉어야 하는 그 순간의 비참함을 영석은 견딜 자신이 없다. 어떻게 보면 이제야 영석이도 돈맛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버스 안의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영석은 자기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식을 팔아 돈을 만지는 손. 수혁의 수첩을 가슴에 품고 분노하던 그 뜨거움은 강남의 안온한 거실에서 내온 시원한 오렌지 주스에 식어버린 것일까.
남부순환로를 달리는 버스들의 불빛이 긴 꼬리를 이루며 붉게 빛나고 있었다. 영석은 그 긴 꼬리의 불빛들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꿈과 현실이 충돌하며 내는 파편 같다고 생각했다.
‘수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방패를 찾아 떠나려 할 때, 나는 고작 이 돈봉투 하나를 놓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오목교가 가까워질수록 영석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버스가 멈춰 서고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4월의 밤공기는 매서웠다. 그것은 도곡동 아파트의 중앙집중식 난방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이 시대의 진짜 온도였다. 영석은 돈봉투가 든 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진흙탕을 걷는 듯 무겁기만 했다.
영석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목교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매캐한 타이어 타는 냄새와 시장통의 비릿한 냄새가 섞인 밤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도곡동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맡았던 그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는 이미 씻겨 나간 지 오래였다.
“어이, 영석이 이제 오는 거여?”
정류장 근처 선술집 앞에서 시장 정리를 마치고 나오던 최 사장과 곰소댁이 영석을 발견했다. 최 사장은 기분이 좋은지 영석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 화창한 봄밤을 그냥 보내긴 아깝잖여? 우리 집 평상에서 소주 한잔 안 헐랑가?”
영석이도 심란한 마음에 소주 한잔이 간절했다.
평상 위에 소반이 놓이고, 곰소댁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손맛이 발휘됐다. 시장에서 갓 건져온 싱싱한 멍게와 문어숙회, 그리고 매콤하게 무쳐낸 파무침이 양은 쟁반 가득 차려졌다.
“오빠!”
영석이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던 숙희가 제 엄마와 영석을 보더니 맨발로 튀어나와 평상 위를 방방 뛰었다. 퇴근한 정희도 부엌에서 일을 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합세했다.
“영석 오빠가 오니까 잔치 같다! 엄마, 나도 사이다 한 잔만!”
숙희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밤의 공기를 간지럽혔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 안쪽, 어디선가 날아온 라일락 향기가 소주 냄새와 섞여 묘한 비장미를 자아냈다.
소주잔이 몇 번 돌고 최 사장이 영석의 홀쭉해진 볼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자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강남 사모님이 돈봉투라도 덜 주던가? 아니면 그 집 자제가 말을 안 들어?”
영석은 주머니 속의 두둑한 돈봉투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저 과외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수혁 형님 일을 겪고 보니, 이제 펜대만 굴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요. 사법고시에 매달려야겠는데, 돈줄을 놓자니 당장 앞이 캄캄합니다.”
영석의 고백에 평상 위는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정희가 영석의 거친 손등 위에 자기 손을 겹치며 간절하게 말했다.
“영석아, 내 월급 쪼개면 네 등록금이랑 책값 정도는 어떻게든 안 되겠니? 나 회사에서 야간근무 좀 더 하면 돼. 네가 공부해서 그놈들 죗값 묻겠다는데, 내가 그 정도도 못 도와줄까 봐?”
최 사장도 헛기침을 하며 거들었다.
“나도 도와줌세. 자네 같은 인재가 돈 때문에 법전을 덮으면 쓰겄는가?”
고마운 말들이었다. 하지만 영석은 그들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곰소댁이나 최 사장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잘 알고 있고, 정희 누나 역시 시골 어머니와 민우까지 챙겨야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다. 가난한 이들이 내미는 손은 눈물겹도록 따뜻했지만, 그 손바닥들 역시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영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곰소댁은 말없이 멍게 한 점을 영석의 젓가락에 끼워주며 혀를 찼다.
“아이고, 이 미련곰탱이 총각아. 시상 천지에 가난뱅이들끼리 서로 등 비벼가며 사는 거 말고 무슨 수가 있겄는가?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디.”
하지만 곰소댁의 말끝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결국 누구 하나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빌딩 숲이 가로막은 시내와 전봇대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힌 오목교의 하늘은 같은 달빛 아래서도 그 온도가 너무나 달랐다.
“조금만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정우 어머니가 저를 너무 신뢰하셔서 단칼에 자르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학생이 저를 믿고 있어서 너무나 고민이에요.”
영석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다시 돈봉투가 든 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자본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그 비겁한 안도감과 지독한 자괴감이 소주잔에 녹아 영석의 목구멍을 타고 쓰디쓰게 넘어갔다. 라일락꽃 냄새는 더욱 짙어졌지만, 평상 위의 네 사람은 각자의 가난을 안주 삼아 묵묵히 술잔만 비워낼 뿐이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숙희는 곰소댁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고, 영석은 멀리 보이는 안양천 뚝방을 바라보며 수아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