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0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31화 내륙의 섬, 그리고 운명 (1)

쌍문동의 집안 공기는 수아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마당에 주차된 그라나다의 번뜩이는 광택은 마치 자신을 가두는 창살 같았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수길이는 서슴없이 ‘사돈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수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수혁이를 떠난 보낸 부모의 심정이나 수길 오빠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자기가 중심을 잡고 있기만 하면 그들도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수아는 오목교의 낡은 정류장에서 터벅터벅 자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영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석이 도곡동 아파트 거실에서 고개를 숙이며 돈봉투를 받아 들고 자괴감에 빠져 있을 시간, 수아는 그를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수아에게 영석은 수혁을 잃은 자리에 돋아난 유일한 살점이었고, 그를 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권력의 진흙탕에 빠뜨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수아는 며칠 뒤, 영석을 종로의 조용한 다방으로 불러냈다. 평소보다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코트를 걸친 수아의 모습에 영석은 낯선 기색을 보였다.

“삼춘! 우리 여행 가자. 동해안도 좋고, 춘천도 좋고, 가능한 강원도 쪽으로 갔으면 좋겠어.”

“갑자기 여행이라니?”

“딱 하루만. 수혁 오빠 보내고 나서, 나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그래.”

영석은 수아의 눈망울에 맺힌 절박함을 읽었다.

“강원도 가고 싶다고 했고, 바다를 보려면 강릉으로 가야 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강릉은 하루 만에 다녀올 수가 없잖아. 기차로는 최소한 7시간 걸리고, 영동고속도로가 뚫렸다지만 고속버스로도 4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고 하던데. 가고 오다 보면 자칫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수아는 속으로 영석이가 참 답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춘천으로 가면 되잖아. 성북역에서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저녁 기차로 돌아오면 돼. 바람만 쐬고 오자는 거야. 대신에 춘천으로 간다면 위도에 가서 바다 보는 흉내라도 내고 싶어.”

영석의 미간에 어린 걱정을 읽은 수아가 억지웃음을 웃으며 덧붙였다. 영석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위도? 춘천은 내륙인데 섬이 있단 말이야?”

“삼춘, 위도는 의암호 한복판에 있는 섬이야. 내륙의 바다라고 불리는 소양강 물줄기가 머무는 곳이지.”

수아는 영석의 당황한 눈빛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을 이었다. 영석에게 위도는 낯선 이름이지만, 수아에게는 이미 며칠 밤낮을 머릿속으로 그려온 ‘지도’ 속의 섬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해. 춘천역에서 내려서 중도 선착장으로 가면 위도로 들어가는 작은 배가 있거든. 호수지만 워낙 넓어서 배를 타고 있으면 정말 바다로 나가는 기분이 들어. 라일락 향기도 좋고 산책로도 잘 되어 있대. 우리 거기 가서 딱 하루, 세상일 다 잊고 꽃구경만 하고 돌아오자.”

영석은 수아의 해맑은 설명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오목교 판잣집의 눅눅한 습기와 도곡동 과외 집의 숨 막히는 공기 사이에서 영석을 버티게 한 것은 수아의 존재였다. ‘당일치기’라는 조건과 ‘내륙의 섬’이라는 낭만적인 제안은 고지식한 영석의 방어막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그래, 정 가고 싶다면 가야지. 일찍 서두르면 저녁엔 돌아올 수 있겠네.”


영석의 대답에 수아는 또 다시 억지웃음을 웃어 보였지만, 코트 주머니 속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을 꽉 맞잡았다. 수아는 춘천행 경춘선 기차가 자주 연착된다는 것을, 그리고 위도에서 중도로 나오는 마지막 배 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이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아는 영석을 보낸 뒤 종로 거리를 걸으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기차에서 내려 춘천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섬 가장 안쪽 라일락 숲까지 삼춘을 데려가야지. 거기서 아주 천천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신발 끈이 풀렸다고도 하고, 풍경이 너무 예뻐서 발걸음을 뗄 수 없다고도 하면서.’

수아는 자기의 가방 속에 넉넉한 현금과 함께 세면도구를 챙겨갈 예정이다. 수아에게 이번 여행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다. 그것은 쌍문동 집 마당에 버티고 선 그라나다의 번뜩이는 광택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방패’로 쓰려는 가족들의 탐욕으로부터 도망쳐 영석이라는 단 하나의 닻에 자신을 영원히 묶어두려는 자신만의 비밀여행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영석이가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배가 끊긴 섬, 사방이 호수로 막힌 그 고립된 공간에서 영석과 단둘이 남게 된다면, 고지식하고 책임감 강한 영석은 결코 수아를 놓지 못할 것이다. 하룻밤의 결합은 수아에게 ‘돌아갈 수 없는 강’이 되어줄 것이고, 부모가 어떤 권력의 사돈댁을 들이밀어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될 터였다.

‘미안해, 삼춘!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삼춘을 잃을 것 같아.’

그러나 수아는 절대 영석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존재한다는 점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수아는 오목교 판잣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영석의 뒷모습을 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영석은 내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성북역에 나타나겠지만, 수아는 그곳에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째로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암호의 차가운 물줄기가 세상과 자신들을 단절시켜 줄 그 순간, 영석은 비로소 온전히 수아의 남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월 19일 토요일, 방송에서는 몽골 부근에서 발달한 강한 저기압의 영향으로 대규모 황사가 한반도를 덮쳤다고 한다. 성북역 광장에는 아침부터 후덥지근한 바람이 몰아쳤다. 4월 중순답지 않게 겉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기온이 높았지만, 하늘은 맑은 봄볕 대신 누런 황사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인 채 거친 모래바람을 뚫고 걸음을 재촉했다.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투명하지 않고 탁해서 광장에 세워진 자동차 보닛은 금세 지저분한 얼룩이 남았다.


성북역 플랫폼은 청춘의 설렘과 시대의 매캐한 냄새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오목교 판잣집에서 새벽바람을 가르며 달려온 영석은 낡은 캔버스 가방의 끈을 고쳐 매며 연신 개찰구 쪽을 살폈다. 성북역은 경춘선 열차의 시발점이자, 서울의 끝자락에서 낭만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드는 해방구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과 커다란 배낭을 멘 대학생들 사이로,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서 있는 디젤기관차의 육중한 소음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삼춘! 많이 기다렸지?”

인파 속에서 수아가 나타났다. 화사한 개나리색 원피스 위로 짙은 남색 코트를 걸친 그녀는 마치 회색빛 역사를 밝히는 한 줄기 빛 같았다. 평소보다도 더 공들여 칠한듯한 붉은 입술이 영석의 시선을 붙들었다. 영석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수아의 작은 손가락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기차는 육중한 몸을 비틀며 철길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좌석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가 가볍게 부딪혔다. 차창 밖으로 월계동과 공릉동, 그리고 태릉 부근의 낡은 집들이 뒤로 밀려나고 푸른 산천이 얼굴을 내밀자, 수아는 아이처럼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정말 떠나네, 삼춘! 꿈꾸는 것 같아.”

영석은 수혁의 죽음 뒤로 수아가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이번 여행이 참으로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차 안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영석이의 앞쪽 좌석에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엠티(MT)’를 가는지 기타 가방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엉성한 솜씨로 튕기는 ‘고래사냥’의 전주가 기차 소음과 버무려졌고, 누군가 꺼내 놓은 신문지 위로는 삶은 달걀과 사이다 병이 굴러다녔다.

그때, 짙은 남색 계열의 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홍익회 판매원이 카트를 밀며 통로에 나타났다.

“삶은 달걀 있습니다. 시원한 사이다, 귤, 도시락 있습니다!”

영석은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한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 도곡동에서 받은 돈봉투의 일부였다. 비겁함의 대가라 생각했던 그 돈이 지금 수아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는 ‘사랑의 밑천’이 된다는 사실이 영석을 즐겁게 했다.

“아저씨! 여기 달걀이랑 사이다 두 병, 그리고 카스텔라 하나 주세요.”

영석이 건네준 삶은 달걀은 아직 따끈따끈했고, 병 사이다의 철제 뚜껑을 딸 때 나는 ‘치익’ 소리는 경쾌했다. 수아는 영석이 정성껏 까서 건네준 달걀을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삼춘이 까주니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이 순간만큼은 수아도 수혁을 잊은 듯했다.


수아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영석이 무심코 손가락으로 닦아주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수아의 젖은 눈동자가 영석을 깊게 파고들었고, 영석은 얼른 사이다를 들이켜며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가 강촌역에 다다르자, 기타를 든 대학생 무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내렸다. 플랫폼에 내려선 그들이 구호를 외치고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흡사 최루탄 가루 없는 다른 세상의 풍경 같았다. 영석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에게는 내일이 축제겠지만, 나에게 내일은 다시 사투겠지.’

강촌을 지나 기차가 북한강 줄기를 끼고 달리기 시작하자 수아는 영석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삼춘! 저 강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영석은 대답 대신 수아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아는 그 품에서 눈을 감았다. 조금 뒤 도착할 춘천,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의암호의 섬 위도. 수아는 그곳에서 마지막 배를 보내버리고 영원한 고립을 택하려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기차의 규칙적인 진동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차는 마침내 남춘천역에 다다랐다. 역 플랫폼을 벗어나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매캐한 서울의 먼지가 아닌, 공지천에서 불어오는 눅눅하면서도 싱그러운 물비린내였다. 하지만 서울에서부터 따라온 황사의 기운은 이곳까지 뻗쳐 있어, 역 앞 광장은 마치 오래된 세피아톤 사진처럼 누런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삼춘, 우리 우선 시내로 나가자. 거기서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좀 하다가 섬에 가자.”

수아는 서두르는 영석의 손을 이끌고 역 앞에 대기 중인 녹색 포니 택시에 올랐다. 그녀는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춘천의 중심가인 ‘명동’으로 부탁했다.

춘천 명동은 서울의 번화가와는 또 다른 활기로 가득했다. 수아는 걸음을 늦추며 상점가 곳곳을 기웃거렸다.

“삼춘, 저기 봐! 육림극장이다. 저기서 영화 한 편 보고 갈까?”

육림극장 앞에는 영화를 기다리는 연인들의 수줍은 모습들이 보였다.

“영화까지 보면 배 시간이 늦어지지 않을까?”

“잠깐 구경만 하는 건데 뭐 어때. 시간이 안 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네. 그렇지만 춘천까지 와서 맛있는 건 먹어야지.”

수아는 영석을 안심시키며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진동하는 가게에서 수아는 김밥과 쫄면을 시켰다. 영석이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수아는 아주 천천히, 김밥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씹으며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영석은 시계를 힐끗거렸지만, 맛있게 먹는 수아의 모습에 차마 재촉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수아는 아주 느긋했다. 그녀는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 골목을 지나며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닭갈비야?”

영석이 웃으며 말했다.

“춘천까지 왔는데 닭갈비는 먹어야지”

무거운 무쇠 불판 위에서 매콤한 양념과 함께 양배추와 닭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삼춘! 이제 위도로 가자!”

수아가 택시를 잡았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택시가 구불구불한 호반 도로를 따라 위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시계는 4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돌아오는 막배가 6시 반이라는데 서둘러야겠어.”

안내판을 살피던 영석이 수아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선착장에는 위도로 들어가는 배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시동을 걸고 있었다. 영석은 수아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뛰었다. 수아는 숨이 찬 척 발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삼춘! 나 너무 힘들어. 배는 자주 있으니 걱정하지 마.”

수아가 힘에 겨운 듯 헉헉대며 말했다.

영석은 간발의 차로 배에 뛰어오르며 수아를 끌어당겼다.

“휴, 하마터면 못 탈 뻔했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보고 바로 나와야 해. 그래야 나가는 막배를 타지.”

영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수아는 배 난간을 잡고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며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의암호의 차가운 물살이 배 옆면을 때리며 튀어 올랐다.

의암호의 푸른 물결을 가르고 위도에 들어섰을 때, 섬은 온통 라일락 향기에 취해 있었다. 육지에서 고작 배로 십여 분 거리였지만, 그곳은 쌍문동의 서늘한 공기도 오목교의 꿉꿉한 가난도 닿지 않는 별천지였다. 수아는 영석의 팔짱을 더 세게 끌어당기며 섬의 가장 깊은 곳, 보드라운 흙길이 깔린 산책로로 그를 이끌었다.

섬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라일락 향기는 지독할 정도로 진해졌다. 수아는 일부러 수풀이 우거지고 선착장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섬의 서쪽 끝단 산책로로 영석을 이끌었다. 4월의 황사 섞인 하늘도 이곳의 푸른 나무들이 걸러내어, 주변은 마치 수중 도시처럼 몽환적인 초록빛이 감돌았다.

“삼춘, 저기 봐. 여기선 세상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려.”

수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영석의 팔을 잡은 채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석은 수아의 젖은 눈망울과 유난히 붉게 타오르는 입술을 보며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수아가 갑자기 절뚝거리며 걸음을 멈추더니 가녀린 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며 나직한 신음소리를 냈다.

“아... 삼춘, 발목이... 아까 뛰다가 접질렸나 봐.”

“뭐? 어디 봐, 많이 아파?”

영석이 당황하며 수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수아는 영석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늦은 오후의 햇살을 내려다보았다. 영석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신발을 벗기고 하얀 양말 위로 발목을 만져보는 동안, 수아는 일부러 영석의 목덜미 가까이 얼굴을 대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삼춘, 너무 아파서 한 걸음도 못 떼겠어.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쉬었다 가자.”

“큰 일 났네. 지금 배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내가 업어줄게. 어서 가야 해.”

영석은 수아를 등에 업으려 했다. 하지만 수아는 영석의 목을 감싸 안은 채 그를 잔디 위로 끌어내리며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영석의 낡은 셔츠 깃을 잡으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삼춘! 그냥 십 분만, 딱 십 분만 이러고 있자. 나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래. 오빠 보내고 처음으로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단 말이야.”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에 영석의 이성이 흔들렸다. 책임감 강한 그였지만, 수아의 눈물 고인 눈동자를 마주하자 도저히 그녀를 재촉할 수 없었다. 수아는 영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주머니 속 시계를 손으로 꽉 쥐었다. 바늘은 가차 없이 6시 20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멀리서 선착장의 마지막 배가 내뿜는 길고 공허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

“배가 떠나려나 봐!”

영석이 벌떡 일어났지만, 수아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영석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

“가지 마, 삼춘. 나 서울 가는 게 너무 무서워. 오늘만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수아의 애원이 호수의 물안개처럼 영석의 가슴을 적셨다. 영석이 갈등하는 사이, 멀리 호수 저편에서 배의 엔진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고요가 섬을 집어삼켰다. 영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선착장 쪽을 바라보았다. 사방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졌고, 의암호의 찬 기운이 발목을 감 싸돌았다.

“이제 어떡하지?”

영석의 목소리는 당혹감으로 가득했지만, 수아는 영석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며 낮게 읊조렸다.

“못 가면 어때. 삼춘이랑 나랑, 그리고 이 라일락 꽃들이 있는데.”

어둠이 내린 섬에는 라일락 향기가 독주처럼 독하게 피어올랐다. 수아는 영석의 굳게 다문 입술에 자기의 엄지를 살며시 갖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그때가 되어서야 영석은 처음으로 이 모든 일이 수아가 꾸민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삼춘, 위도라는 이름은 ‘고슴도치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대. 하늘에서 보면 이 섬 모양이 고슴도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

선착장 매표소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호수는 집어삼킬 듯 검게 변해갔다. 영석은 허탈한 듯 긴 한숨을 내뱉었지만, 수아의 젖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밀려드는 자책감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선착장 뒤편, 듬성듬성 불이 켜진 민박집 골목으로 향했다. 위도의 민박집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단층 건물에 ‘민박’이라고 투박하게 써 붙인 간판들이 전부였다.

“빈방 있습니까?”

영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인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열쇠 꾸러미를 챙겨 들었다. “막배 놓쳤구먼. 딱 하나 남았소. 뜨끈하게 불 넣어 줄 테니 들어가 쉬시오.”

좁은 방 안에는 낡은 꽃무늬 벽지와 눅눅한 솜이불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상 위로 주인 할머니가 투박하게 차려낸 저녁상이 들어왔다. 갓 지은 쌀밥에 호수에서 건져 올린 민물고기 조림, 그리고 시큼하게 익은 김치가 전부였지만, 배가 고팠던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성찬도 부럽지 않았다.


수아는 가방 안에서 낮에 명동을 지나며 몰래 사두었던 작은 소주 한 병을 꺼내 놓았다.

“삼춘, 우리 딱 한 잔만 마실까? 이 밤이 너무 고요해서 그래.”

영석은 말없이 잔을 채웠다. 독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긴장으로 팽팽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창밖으로는 봄밤의 바람이 라일락 향기를 방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었고, 흔들리는 촛불처럼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일렁였다. 수아는 술기운을 빌려 조금 더 영석에게 다가앉았다.

“삼춘, 나 아까 배 떠날 때 속으로 웃었어.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수아의 고백에 영석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수아의 눈에 서린 그 지독한 고독과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갈망을 읽어냈다. 동시에 이 모든 고립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수아는 겉옷을 벗고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영석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수아의 손이 영석의 손등을 타고 올라와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수아의 입술에서는 달콤한 라일락 향과 쌉싸름한 소주 냄새가 섞여서 났다. 영석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오목교 판잣집의 가난도, 도곡동에서의 자괴감도 잊게 할 만큼 수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녀가 내미는 구애는 거부할 수 없는 독배와 같았다.

수아는 눈을 감았다. 수아의 귓가에 닿은 영석의 숨결은 뜨거웠다.

영석은 수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그녀의 이마에 아주 길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영석은 수아의 젖은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간절함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성이 비명처럼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수아의 애달픈 구애는 영석의 심장을 이미 난도질한 상태였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수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낡은 민박집의 습한 공기는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처음에는 깃털이 내려앉듯 조심스럽고 가벼운 접촉이었다. 수아의 입술에서는 차가운 밤공기와 쌉싸름한 소주 향, 그리고 그녀가 하루 종일 품고 있었을 간절한 갈망이 한데 섞여 전해졌다. 영석의 입술이 수아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자, 수아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영석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키스는 갈수록 깊고 농밀해졌다. 영석의 혀가 수아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자, 수아는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며 그의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욕망의 분출이 아니었다. 쌍문동의 그라나다가 상징하는 권력의 위협으로부터, 그리고 오목교 판잣집이 대변하는 가난의 굴레로부터 서로를 구원하려는 듯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수아의 여린 혀가 영석의 입안을 더듬을 때마다 영석의 머릿속은 하얗게 타들어 갔다.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라일락의 진한 향기가 환각처럼 밀려왔고, 영석의 커다란 손은 수아의 가녀린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그녀의 떨림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수아는 영석의 뜨거운 숨결이 입안을 가득 채울 때마다, 자신이 비로소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에서 벗어나 안전한 섬에 도착했음을 느꼈다.

영석은 수아의 입술을 탐닉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 달콤한 행위 끝에 기다리고 있을 현실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아의 입술에서 잠시 떨어져 그녀의 붉게 상기된 뺨과 풀린 눈동자를 응시했다. 수아의 고른 숨소리가 정적을 깨뜨렸고, 영석의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젖은 입술 주위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그는 수아를 지켜주겠다는 다짐과 그녀를 취하고 싶은 욕망 사이의 팽팽한 줄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영석은 수아를 다시 한번 깊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키스는 두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낙인이자,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운명의 폭풍 전야에 누리는 마지막 평온이었다.

영석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을 억지로 떼어냈다. 수아의 가느다란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지만, 그는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수아의 원피스 어깨끈이 살짝 내려가 있었고, 드러난 하얀 살결은 촛불 아래에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욕망이 아니라,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이자 두려움이라는 것을 영석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까지만 하자.”

영석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수아는 몽롱한 눈을 뜨며 영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거절당했다는 당혹감보다, 자신을 온전히 던져서라도 이 남자를 묶어두고 싶었던 절박함이 무너져 내리는 허탈함이 스쳤다.

“왜? 내가 무서워? 아니면 내가 삼춘을 너무 힘들게 할까 봐?”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석은 대답 대신 수아의 어깨끈을 정성스럽게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인 낡은 솜이불을 끌어당겨 수아의 몸을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마치 세상의 모진 바람으로부터 그녀를 격리하려는 보호막처럼.

“무서운 건 내가 아니라, 내일 아침에 네가 느낄 후회야. 수아! 넌 나한테 너무 존귀한 사람이야. 오목교 판잣집에서 내가 유일하게 꿈꿀 수 있게 해 준 사람이고. 그런 너를 이런 식으로, 이 좁고 눅눅한 방에서 ‘사건’처럼 가지고 싶지 않아.”


영석은 수아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네가 쌍문동 집을 지옥이라 말해도, 나는 네가 그 집 대문을 당당하게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 내가 오늘 널 취하면, 난 널 지켜주는 게 아니라 너를 내 밑바닥 인생으로 끌어내리는 것밖에 안 돼.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겁함이야.”

수아는 영석의 단단한 눈빛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너무나 아끼기에 끝내 선을 넘지 않는 영석의 고결함은, 역설적이게도 수아가 가문의 탐욕에 맞서 휘두를 수 있었던 유일한 칼날을 꺾어버린 셈이었다.

‘삼춘의 이 지독한 결백함이 결국 나를 사지로 밀어 넣게 될지도 모르겠어.’

수아는 어둠 속에서 영석의 손을 잡으며 직감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그의 고집스러운 사랑이, 훗날 자신이 원치 않는 가문의 정략이라는 제단 위로 힘없이 끌려가게 만드는 가장 아픈 변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아는 이불속에 몸을 웅크린 채 영석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석의 눈은 창밖의 검은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고, 그 단단함이 수아에게는 오히려 서글픈 벽처럼 느껴졌다. 수아는 자신이 아무리 덫을 놓고 시간을 멈추려 해도, 영석이라는 남자는 결코 자신의 자존심과 수아에 대한 예우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지키려고 하는구나. 내가 나를 버리려 해도, 이 사람은 끝까지 나를 붙들고 있겠구나.’

수아는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임을 예감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계획했던 ‘사건’은 실패했고, 자기 몸을 증거로 삼아 가족들에게 대항하려던 발악도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배가 끊긴 고립된 섬, 단 한 장뿐인 이불 위에서도 자신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지켜야 할 존엄’으로 대해주는 남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차갑던 그녀의 가슴을 데웠다.

“운명인가 보네.”

수아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것은 배를 놓치게 만든 자신의 계략에 대한 체념이기도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여자’이기 이전에 ‘수아’로 봐주는 이 고지식한 남자를 평생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는 항복 선언이기도 했다.

영석은 수아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손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방 안의 촛불이 다 타들어 가 꺼질 때까지, 영석은 눕지 않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라일락 향기를 맡았다.


https://m.youtube.com/watch?v=qUCNgWsoe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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