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32화 비극의 전야, 그리고 그날 (1)

영석이로부터 걸려 온 안부 전화를 받고 난 후, 수아는 밤새 뜬눈으로 방 안을 서성였다. 영석에게 자기가 맡긴 수혁이 오빠의 수첩을 돌려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석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가슴이 아팠다.

수혁 오빠의 죽음. 그것은 수아의 삶을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오빠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그 수첩에는 권력의 심장부를 겨눈 날카로운 진실들이 적혀 있었다. 수아는 그 진실을 밝히는 것만이 오빠의 억울한 넋을 달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위도에서의 그 밤 이후, 수아는 영석이가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길을 함께 걷기에는 너무나 깨끗한 영혼이고, 따라서 그런 진흙탕 속에 영석이를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굳혔다.

‘삼춘은 아무 죄가 없어. 하지만 그 죄 없음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큰 죄일지도 몰라.’

수아는 자신의 행위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괜히 영석이에게 미운 마음이 드는 자신을 또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아는 전화를 걸어온 영석에게 서울역사 내의 ‘서울역 그릴’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나오면서 오빠의 수첩도 가지고 오라고 했다. 5월 중순의 서울역은 계엄군과 전경들이 뿜어내는 서슬 퍼런 살기와, 어디론가 떠나려는 피난민 같은 인파의 소음으로 뒤섞여 기괴한 풍경을 자아냈다.

‘서울역 그릴’로 들어선 영석은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채 창가에 앉아 있는 수아를 발견했다. 수아는 화사했던 개나리색 원피스 대신, 몸을 꽁꽁 싸맨 짙은 회색 트렌치코트 깃을 세운 채 나타났다. 그녀의 눈빛은 위도에서 보여주었던 그 뜨거운 갈망 대신, 서울역 광장의 아스팔트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잘 지냈어?”

영석이 다가오며 수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수아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영석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민망해진 자기 손을 어떻게 할지 몰라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잠시 서 있었다.


“수첩 가져왔어?”

수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안부도, 사과도, 원망조차 섞이지 않은 지독하게 사무적인 말투였다. 영석은 수아의 그 낯선 태도에 숨이 멎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 여기.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간직했었어.”

영석이 안주머니에서 정성스럽게 비닐로 두 겹이나 싼 수첩을 꺼냈다. 수아는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자기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영석은 평소와 너무 다른 수아의 태도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수혁이 형님 수첩에는 수혁이 형님이 손톱으로 꾹꾹 누른 자국이 있어 그 글자들만 모으면 형님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 거야.”

수아는 단 한 번도 영석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무심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해야지. 뭘 먹을까?”

“아무거나. 삼춘 먹고 싶은 것 먹어.”

영석은 종업원을 불러 돈가스 두 개를 시켰다.

둘 사이에는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대화의 역학은 자연계의 물리 법칙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인간에게는 밀폐된 공간에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본능적 기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평소 대화를 독점하던 수아가 입을 닫으면 대화의 장에는 거대한 진공상태가 형성된다. 이때 말수가 적던 영석은 이 침묵을 심리적 압박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며, 이를 메우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말을 쏟아내게 되어 있다.

이를 단순히 수다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관점을 달리하면 영석의 발화는 관계의 붕괴를 막기 위한 무의식적 헌신에 가깝다. 즉, 수아가 침묵함으로써 대화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수동적 상태’가 되자, 영석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실행적 능동성’을 발휘하며 관계의 총량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마치 시소의 한쪽이 내려가면 반대쪽이 올라가야만 상호작용이 지속되듯, 대화의 양은 고정된 수치가 아니라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되는 동적인 평형 상태라 할 수 있다.

“제발 나를 한 번만 봐줘. 나에게도 설명할 기회를 좀 줄 수 없을까?”

“설명? 그날 밤 삼춘이 보여준 게 전부 아니었어? 삼춘은 끝까지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거잖아. 나를 진창에서 구해주겠다는 그 고결한 자존심 지키느라고 말이야. 삼춘은 도대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수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영석이 사랑했던 그 맑은 수아의 웃음이 아니었다.

“이 수첩, 삼춘한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을 거야. 이제 내가 가져갈게. 이건 오빠의 목숨값이고, 내 남은 생애를 던질 무기니까.”

영석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수아의 눈동자에 잠시 눈물이 고이는 듯했지만,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서울역 시계탑의 바늘이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영석은 아무 말없이 종업원이 가져온 돈가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나 돈가스가 입안에서 껄끄럽게 느껴져서 결국 절반도 먹지 못한 채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수아 역시 샐러드만 먹고 돈가스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식어버린 돈가스는 금세 노랗게 질린 모습이 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아는 접시 끝의 샐러드만 가시처럼 씹어 삼켰다. 그녀에게 이 식사는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영석과의 인연을 마지막으로 도려내는 의식 같았다.

영석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한 기분으로 간신히 입을 뗐다.

“위도에서의 일은 네가 소중해서 그랬어. 널 아끼고 싶었을 뿐이야.”

그 말에 수아의 포크가 쟁반 위로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수아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영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차가운 얼음송곳 같은 시선이었다.

“아껴? 삼춘, 그건 삼춘의 오만이야. 그날 밤 내가 원했던 건 고결한 보호가 아니라, 삼춘이라는 밧줄에 내 인생을 묶어버리는 거였어. 그래서 세상이 나를 아무리 진흙탕으로 끌어내려도, 삼춘의 여자라는 이름 뒤로 숨고 싶었다고.”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아니면 차마 내뱉지 못한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삼춘이 내 순결을 지켜줬을 때, 나는 구원받은 게 아니라 버려진 기분이었어. 내 마지막 승부수가 삼춘의 그 잘난 ‘도덕심’에 막혀버린 거니까. 덕분에 확인했지. 삼춘은 내가 가야 할 이 피비린내 나는 길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 수치스러웠어.”

영석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자신이 지켜주려 했던 것이 오히려 수아에게는 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라 믿었으나, 수아에게 사랑은 ‘공범’이 되는 것이었다.

“수첩 가져왔으니 이제 됐지? 식사비는 내가 계산할게. 삼춘은 그 깨끗한 손으로 좋은 세상 꿈꾸며 살면 돼.”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석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위도에서 잡지 못했던 그 손이었다.

“잠깐만. 내가 몰랐어. 네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 다시 시작하자. 내가 그 진흙탕에 같이 들어가면 되잖아. 그 수첩, 혼자 감당하게 안 둬.”

수아는 영석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니, 삼춘은 못 해. 방금 그 돈가스도 절반도 못 먹었잖아. 이 수첩 속에 든 진실은 그 돈가스보다 수만 배는 더 역겹고 비릿해. 삼춘 같은 사람은 한 페이지도 못 넘기고 토해버릴걸.”

수아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훨씬 더 거칠다는 것에 혼란을 느꼈다. 그러나 제어가 되지 않는 자신에 놀라고 있었다.

수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역 그릴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수아는 가방 속 수첩의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영석은 안전해졌지만, 대신 그녀의 마음속에는 영영 채워지지 않을 거대한 진공상태가 들어앉았다.

홀로 남겨진 테이블 위, 두 개의 돈가스는 마치 주인 잃은 무덤처럼 나란히 식어가고 있었다. 영석은 그제야 자신이 지킨 것은 수아의 순결이 아니라, 수아와 함께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식어버린 무덤 같은 접시를 뒤로하고, 영석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묵직한 유리문을 밀치고 나오자, 방금까지 ‘그릴’의 정적인 공기에 눌려 있던 감각들이 서울역 광장의 거친 소음과 뒤섞여 폭발하듯 밀려왔다.

“수아야! 수아야!”

영석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광장은 이미 거대한 혼돈의 도가니였다. 5월의 뙤약볕 아래, 총을 든 계엄군들의 삼엄한 감시와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피난민 같은 인파 속에서 수아의 회색 트렌치코트는 마치 금방이라도 증발해 버릴 연기처럼 보였다.

수아는 이미 광장 저편, 도로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영석이를 만날 때마다 운동화를 신고 와서 앞장서서 빠르게 걷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의 뒷모습은 단호했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단 한 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절교의 선언이었다. 영석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죽어라 뛰었다. 누군가의 짐 보따리에 걸려 휘청거리고, 대기 중인 전경들의 방패에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그의 눈은 오직 저 멀리 멀어지는 회색빛 뒷모습만을 쫓았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수아야!”

영석의 절규는 매연 섞인 바람에 흩어졌다. 횡단보도에 이르렀을 때, 신호등의 불빛이 야속하게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나오는 차량의 행렬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영석은 차도 속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거칠게 울리는 경적과 운전사들의 욕설에 가로막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장벽 너머에 수아가 멈춰 섰다. 그녀는 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초록색 택시의 문을 열었다. 차에 오르기 직전, 수아는 아주 찰나의 순간 고개를 돌려 영석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깐만, 잠깐만!”

신호가 바뀌자마자 영석은 미친 듯이 도로를 가로질러 대우빌딩 앞 택시 정류장까지 달렸다. 그러나 수아가 탄 택시는 막 출발하고 있었고 영석은 차체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창문을 두드렸다.

“잠깐만. 제발!”

그러나 택시의 뒷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수아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만 들썩거리고 있었다. 곧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사에게 재촉하듯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택시는 매캐한 매연을 영석의 얼굴에 뿜어내며 미끄러지듯 택시 정류장을 빠져나갔다. 영석은 택시 뒤를 따라 몇 걸음을 더 뛰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기계의 속도를 이길 수 없었다.

시청역 방향으로 점점 작아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보며 영석은 무릎을 꿇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바닥에는 조금 전 택시를 두드렸던 금속의 차가운 감촉만이 남아 있었다.


서울역 시계탑의 바늘이 다시 한 칸을 무심하게 넘겼다. 영석이 지키려 했던 그 모든 도덕과 순결이, 이 살벌한 시대의 광장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영석에게 비로소 뼈저린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영석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바닥에는 조금 전 택시 외벽을 두드린 금속의 차가운 진동이 여전히 남루한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이것은 남녀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근원적인 비극인지도 모른다. 영석에게 사랑이란 ‘보존’이었다. 그는 수아를 이 험한 시대의 풍파로부터 격리해, 그녀의 고결함을 온전히 지켜주는 것만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믿었다. 위도에서의 그 밤, 그가 욕망을 억누르며 수아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그녀를 ‘지켜야 할 대상’으로 정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원칙을 중시하는 남성 특유의 관념적 도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아에게 사랑은 ‘공범’이 되는 것이었다. 가족을 잃고 벼랑 끝에 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박물관의 유리 박스 같은 안전한 보호가 아니라, 함께 진흙탕을 뒹굴며 운명의 피칠갑을 나누어 가질 동반자였다. 수아가 위도에서 던졌던 승부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줌으로써 영석을 퇴로 없는 공범의 길로 끌어들이려는 절박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영석은 그 맥락을 읽지 못한 채 ‘신사’로 남기를 택했고, 그 순간 수아에게 영석은 ‘사랑하는 남자’에서 ‘지켜줘야 할 무력한 도덕군자’로 격하되었던 것이다. 수아가 택시 뒷유리 너머로 영석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결심이 이미 완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남성이 영석처럼 파국이 닥친 뒤에야 다급하게 거리를 달리고 차를 두드리는 사후적 행동에 나서지만, 여성들은 이미 폭풍 전야의 침묵 속에서 수만 번의 예행연습을 마친 뒤에야 이별의 문을 열곤 한다. 수아는 밤새 뜬눈으로 서성이며 영석이라는 안식처를 자신의 삶에서 도려내는 수술을 이미 끝마쳤다. 그래서 서울역 그릴의 문을 열고 나올 때, 그녀는 이미 영석이 닿을 수 없는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 있던 것이다. 참 야속한 것이 여자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영석은 무력한 모습으로 멀어지는 택시가 남대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석은 자신이 지킨 것은 수아의 순결이 아니라 자신의 고결한 자존심이었으며, 그 대가로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유일한 티켓을 스스로 찢어버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울역 시계탑은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석의 손바닥에 남았던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이제 시린 통증으로 변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신길동 골목 끝자락, 주인 없는 최 사장의 집은 민우에게 거대한 도서관이자 고독한 요새였다. 최 사장이 오목교 판잣집 곰소댁과 살림을 합쳐 떠난 뒤로, 이 낡은 벽돌집은 민우의 숨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고이는 정적의 공간이 되었다. 민우는 이곳에서 일동방직의 내부 구조도와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 지침을 다듬으며 밤을 지새웠다.

“야! 김정희. 너 김성태, 아니 함민우를 잘 알고 있었다던데 맞아?”

“여우같이 나를 속였단 말이야?”

이상우 관리부장이 막 출근해서 옷을 갈아입으려던 정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정희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희는 여기에서 밀리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평소의 관리부장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어떻게든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김성태는 아는 사람이지만 함민우는 누구예요?”

“야! 이것들 봐라. 내 눈앞에서 시치미를 떼시겠다 이 말이지?”

“너! 중정사람들의 정보력을 우습게 알고 있나 본데, 택도 없는 일이다.”

“도대체 아침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희는 오히려 이상우에게 화를 내는 모습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너랑 함민우가 다방에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함민우가 누구냔 말입니다.”

정희는 공격적으로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이상우가 한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성태말이야.”

“김성태 씨가 뭘요?”

“그놈이 함민우란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상우도 정희의 똑 부러지는 태도에 긴가민가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희는 심장의 박동이 귓가에 울릴 정도로 요동쳤지만,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이상우를 쏘아보았다. 지금 여기서 눈동자 하나라도 떨리면 민우와 자신, 그리고 최 사장 네 아지트까지 모조리 파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서류 뭉치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부장님, 지금 생사람 잡으시는 거예요? 제가 김성태 씨랑 커피 한 잔 마신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나요? 여우같이 속였다고요?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이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정희의 반응이 예상보다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커피? 그냥 커피 한 잔 마신 사이라고?”

“네! 지난번 다방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요. 그때 부장님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요즘 공장 분위기 흉흉하니까 여공들 사이에 무슨 소문 도는지 좀 알아보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난 김에 김성태 씨한테 부탁 좀 했어요. 성태 씨가 공장 주변 사람들 많이 알잖아요. 여공들 중에 이상한 소리 하는 애들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커피 한 잔 산 게 다예요.”


이상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김성태 씨가 함민우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라는 건 지금 부장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그 사람이 정말 그런 무서운 사람이라면, 저를 정보원으로 이용하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 아니에요? 세상에,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부장님 지시대로 애들 동태 파악하려다가 제가 큰일 날 뻔한 거잖아요!”

정희는 이제 억울하다는 듯 눈시울까지 붉히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우는 정희의 ‘정보원’ 운운하는 말에 오히려 자신이 무리한 지시를 내려 정희를 위험에 빠뜨렸나 하는 착각에 빠진 듯했다.

“그...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지시를 이행하려고 놈을 만났다 이 말이냐?”

“일부러 만난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쳤고, 만난 김에 잘 되었다 싶어 부탁한 것이라고요. 그 사람이 함민우라는 사람이었다고요? 제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꾀죄죄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겠어요? 부장님한테 칭찬 좀 받아보려고 정보 좀 캐보려던 건데, 이제 와서 저를 빨갱이 취급하시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당장 그만두면 될 거 아니에요!”


정희가 가방을 챙기며 사직서를 쓰려는 시늉을 하자, 이상우는 도리어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중정에서 내려온 첩보라 큰소리를 쳤지만, 만약 정희가 정말 자신의 지시로 움직인 것이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어허, 이 사람이. 누가 그만두라고 했나? 그놈이 워낙 거물이라서 확인해 본 것뿐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일 봐.”

이상우가 찝찝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온 정희는 복도 끝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칸 문을 잠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고,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우씨. 들켰어. 중정이 이미 민우씨를 알고 있어.'

정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상우는 일단 속였지만, 그의 말대로 중정의 정보력이 이미 뻗어 있다면 신길동 그 집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금 당장 민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놈들의 의심은 더 커질 수 있으니 참기로 했다.

정희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최 사장도 없는 그 텅 빈 집에서 혼자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민우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희는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민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직접 움직일 수 없다면, 감시의 눈길이 닿지 않는 ‘제3의 통로’를 찾아야 했다.

정희는 점심시간을 틈타 공장 근처 구멍가게에 있는 공중전화기로 향했다. 등 뒤로 중정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녀가 전화를 건 곳은 태종이네 집이었다.

“태종아, 나 정희야. 지금 바로 신길동 형님 댁으로 좀 가줘야겠어. 가서 네 형님에게 전해줘. ‘비가 많이 샌다면서 다른 집으로 이사하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한마디도 토 달지 말고 지금 당장 가야 해. 알았지?”

수화기 너머 태종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정희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간첩 조작과 중정의 이름이 오가는 이 판국에 태종마저 위험에 빠뜨리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지만, 지금 민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태종뿐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태종이나 민우가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말로 통화를 했다.

불안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퇴근 후 정희는 녹초가 되어 오목교로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술 냄새와 낮은 신음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영석아!”

토방 밑에 영석이 신발도 벗지 못한 채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영석이가 입은 옷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그의 곁에는 책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영석아! 정신 좀 차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정희가 다급하게 영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영석은 초점 없는 눈을 간신히 뜨며 정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이미 눈물로 짓물러 있었다.

“누나 내가 죽였어. 내가 수아를 죽였어. 내 그 잘난 깨끗한 손으로 수아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단 말이야.”

영석은 정희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민우의 위기만으로도 벅찬 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동생 영석이마저 처참하게 부서진 채 그녀의 앞에 던져져 있었다.


“영석아! 정신 좀 차리고 나를 봐.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누나 수아가 나를 떠나려 해. 나 이제 어떡해?”

“워메 이게 뭔 소리당가?”

영석의 울음소리에 놀란 곰소댁과 최 사장이 달려 나왔다.

“이게 뭔 소리여?”

최 사장도 쓰러져 있는 영석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곰소댁은 영석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혀를 차며 정희의 손에서 영석의 한쪽 팔을 건네받았다. 최 사장과 곰소댁이 양쪽에서 부축하자, 술기운에 몸이 천근만근인 영석이 간신히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워메, 영석이 총각이 술을 요렇게 먹은 건 내 생전 첨 본다잉. 대관절 수아 처녀랑 뭔 사달이 났길래 요 모냥 요 꼴이랴?”

곰소댁은 방바닥에 영석을 눕히며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영석의 흙투성이 얼굴을 닦아내는 곰소댁의 손길은 거칠면서도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최 사장은 영석의 벗겨진 양말을 정리하며 헛허허,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최 사장님, 지금 웃음이 나오셔요? 애가 지금 수아를 죽였네, 어쩌네, 하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구는데!”

정희가 답답한 듯 소리를 낮춰 말하자, 최 사장이 영석의 등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정희 씨, 원래 젊은 놈들 사랑싸움이라는 게 다 저런 법이여.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당장이라도 세상 끝날 것처럼 곡소리 내다가도, 내일 아침에 해 뜨고 얼굴 맞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히죽거리는 게 그놈의 연애질 아니여?”

“그라제, 암만. 수아처녀가 보통 단단한 가시내여? 영석이 총각이 워낙에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응께, 아마 수아 처녀의 그 불같은 성미에 한번 호되게 데인 모양이구만 그려. 죽였네, 살렸네, 하는 거 봉께, 수아 처녀가 단단히 삐쳐서 다신 안 볼 것처럼 몰아붙였나 보제.”

곰소댁이 맞장구를 치며 영석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어주었다.

“그래도 영석이 눈 좀 보세요. 저건 그냥 싸운 눈이 아니에요.”

정희는 민우의 위기와 겹쳐 영석의 절망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지만, 최 사장은 그저 정희를 안심시키려는 듯 껄껄 웃었다.

“걱정을 하덜 말어. 영석이가 워낙 ‘샌님’이라 그려. 수아 처녀가 어디 보통내기여? 영석이 길들이느라고 일부러 더 세게 나간 걸 거여. 영석이도 내일 아침에 쓰린 속 부여잡고 일어나면, 염치 불고하고 수아네 집 앞으로 뛰어갈걸?”

최 사장과 곰소댁은 영석의 통곡을 피 끓는 청춘의 요란한 ‘사랑병’ 정도로 치부하며 만담 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넉살 좋은 대화 뒤편에서, 정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영석의 비명 같은 고백 “내 깨끗한 손으로 수아를 밀어버렸다”는 말이 자꾸만 가슴을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는 영석의 고른 듯 불규칙한 코골이와 진한 술 냄새만이 가득 찼다.

“임자, 우리도 가서 발 닦고 잡시다. 젊은것들 일에 우리가 밤샐 거 없응께”

곰소댁과 최사장이 웃으며 정희네 방을 나섰다.

5월 17일 낮 최고 기온은 24-25℃까지 올라가 초여름처럼 약간 더웠으나 밤 기온은 14-16℃의 선선한 날씨다. 그리고 지금은 오목교 위로 초승달이 떠 있는 차분하고 정적인 고요함 속에 무언가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 같은 미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밤이다.

글을 다 읽으셨다면 다음 노래도 꼭 한번 들어주세요. 다만 아이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아래 동영상을 들을 수 없다는 문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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