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약

by 서완석


세상에 와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고

남은 게 있다면 가벼운 가방 하나에 담아

불쑥 길을 떠나고 싶다.


내 어린 시절 살던 동네 뒷동산은 어떨까.

해남 땅 어느 산 골짜기 굽이 돌아올라

서너 평 양지바른 곳이면 딱 좋겠다.


그쯤에 가방 속 것들 탈탈 털어놓으면

내 좋은 날의 기억들도 따스한 봄볕에

스멀스멀 기어 나와

세상살이 재계약하자고 덤빌지 누가 아나.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힘이 나겠네.

또 한 철 살아지겠네.


하지만 2년 살이 뒤에

정신없이 뛰놀던 기억들이

또다시 떠나자고 보채면 어떡하나.


칡뿌리 몇 개, 빨간 맹감 알 몇 개 쥐여주고

계약서 다시 쓸 수 있을까.


그러면 살겠는데

딱 2년만 더 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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