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_독자에게 닿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by 축성여석

편집자의 수첩에서 꺼낸 오래된 문장

내가 편집자의 길을 걸은 지 어느덧 사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 세월 동안 가장 깊이 새긴 문장이 있다. 안정효 선생의 『글쓰기 만보』에서 처음 만났던 한 구절이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책상 앞에서 수없이 그 문장을 되뇌었다. 처음에는 경고처럼 들렸고, 나중에는 위로처럼 다가왔다. 글을 쓰는 사람, 글을 고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이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거울 앞에 선 글

나는 편집자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수많은 문장과 마주했다. 어떤 글은 화려한 수사로 독자를 현혹하려 했고, 어떤 글은 자신을 포장하느라 정작 전하고 싶은 말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글들을 읽을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글은 결국 작가의 얼굴을 닮아가는데, 그 얼굴이 거짓으로 채워질 때 독자는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한 유명인사의 원고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담을 부풀리고 실패를 예쁘게 포장하려 했다. 나는 몇 차례 “진실을 조금 더 보여 주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독자들은 성공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결국 책은 많이 팔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은 진실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고, 독자들의 손에서도 멀어졌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단기적인 반짝임은 있을지 몰라도, 진심 없는 글은 오래 남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성, 글을 살리는 숨결

좋은 글은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모자람을 숨기지 않는 데서 생명이 시작된다. 나는 원고를 읽을 때마다, 또 내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은 진짜 내 생각인가?’

‘이 고백은 과장되지 않았는가?’

때로는 드러내기 싫은 치부나 미숙했던 흔적까지 꺼내야 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문장들이 독자에게 더 깊이 가닿았다. 독자는 완벽한 작가가 아니라, 자신처럼 흔들리고 실수하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책임, 글이 세상과 맺는 약속

책이라는 매체는 한 번 세상에 나가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늘 작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문장이 누군가를 속이지는 않을까?”
“이 정보가 혹시 오해를 남기지는 않을까?”

그것은 불신이 아니라 약속이다. 독자와의 약속, 그리고 글이라는 공적인 기록에 대한 책임이다.

돌아보면, 글쓰기도 편집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독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예리한 눈으로 글의 진심을 읽어낸다. 내가 이 말을 오래 간직하는 이유는, 그것이 두려운 명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장은, 글을 쓰는 우리가 독자를 믿어도 된다는 약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수첩 한 구석에 그 말을 적는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그 말 아래 이렇게 덧붙인다.
– 그러니 당신도, 거짓말하지 말 것.

성책경심.jpg


이전 09화<On Writing> — 글쓰기는 재능이 아닌 꾸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