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삶을 성찰하는 지혜
한창 잘나가던 인사가 어떤 잘못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유명인이 얼굴이 화끈거리는 행태로 언론매체에 보도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하는데, 얼굴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한 번 오명을 쓰면 좀처럼 씻어내기 어렵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나, 추락은 언제나 일순간이다. 속된 말로 '한 방에 훅 간다'고 하는데, 불상사의 원인 중 99%는 지나친 욕심이나 그릇된 욕망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는 묘한 것이라서 출세한 사람, 즉 유명인이나 고위공직자의 추락을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쌤통'이라며 즐기는 경향이 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남의 불행을 속으로 고소해하는 심리학 용어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불행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심술궂은 본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높이 올라갈수록, 많이 알려질수록 극도의 자기 절제와 관리가 요구된다.
살면서 항상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잘난 척'이다.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절대 자신의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랑질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게 하는 까닭이다. 잘난 척 교만을 떨다가는 언젠가 큰코다칠 날이 오게 마련이지만, 인간의 최대 맹점은 아무리 큰 교훈이 있더라도 자신이 직접 겪지 않으면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서야 '아차!' 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다.
욕망과 욕심은 인간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이며, 생명력의 원천이자 살아가는 힘이다. 욕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 숨 쉬는 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인류가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 후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중요한 물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욕망에 대한 것이다.
약 2500년 전, 서양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결핍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욕망이라고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은 서양 철학의 큰 물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도도히 흐른다. 즉 욕망의 본질은 결핍이고, 결핍이 있어야 비로소 채우고 싶으며, 그것을 채워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유이다. 내 몸, 즉 형이하학의 말단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이상학으로 이끌어 가는 욕망에 대한 담론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에,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동양의 현자들 또한 일찍이 인간의 욕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양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경전을 보면 욕심을 경계하고 위험시하는 내용이 참으로 많다. 이들은 모든 죄악의 씨앗이 결국 욕심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특히 욕망과 욕심을 가장 경계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불교 철학인데, 탐욕은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의 첫 번째 요소로 반드시 제거해야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불교의 경전에서 욕망은 곧잘 타오르는 불에 비유되며,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 그 당사자를 만신창이로 만들기에 그 끝은 언제나 비참하다고 경고한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욕망을 '푸줏간 앞의 개'에 빗대어 표현했다. 눈앞의 고기를 향한 욕망과 푸줏간 주인의 시퍼런 칼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전진도 후퇴도 못 하고 머뭇거리는 이 절묘한 비유는, 그 가련한 개의 모습이 이따금 내 모습으로 투영될 때가 있었다.
살면서 욕심나는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욕망이 크고 집요하게 동할 때면 푸줏간 앞을 서성거리는 개가 떠올랐고, 그때는 임계점이 넘지 않도록 힘껏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니체는 제대로 제어하기만 하면 색욕을 포함해서 욕망하는 일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가 산다고 하는 인디언의 전설처럼,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사사건건 싸우지만, 이기는 쪽은 언제나 그 마음의 주인이 먹이를 주는 쪽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 전설이 내포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오랫동안 사유하며 걸작 『파우스트』를 완성했을 것이며, 파우스트는 "아, 내 가슴속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구나!" 하면서 마음속에서 다투는 천사와 악마를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본다.
욕망은 야누스와 같이 앞뒤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빛과 어둠, 창조력과 파괴력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욕심은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데, 좋은 것을 혼자만 차지하려는 이기심이 증폭하여 생각의 눈과 귀를 막고 사리 분별력을 떨어뜨린다.
눈앞의 욕심을 과감히 버리면 비로소 건강한 욕망이 뚜렷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동물계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뚜렷한 점은, 바로 이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는 이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결국, 짐승으로 살아갈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는 여러 실험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밝혀냈는데, 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결핍을 해소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 동기에 의해 나타나는 욕망이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서 발현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것이다.
저차원적 욕망이 충족되면 자아실현을 위한 성장 동기에 의해 고차원적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성장 동기에 의한 건강한 욕망이 강한 사람은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가 깊고, 마음에 여유가 넉넉하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넘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실현에서 최고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링컨의 숭고한 욕망이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세상에 길이 남을 필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자신이 꿈꾸던 욕망을 아름답게 승화시켰고, 이러한 고차원적 욕망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으며, 세상은 여전히 희망적인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욕망과 욕심이란 말은 혼용되지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젊은 시절 내가 출판사의 일자리를 구할 때, 어느 출판사 사장님이 면접 중 불쑥 '욕구, 욕망, 욕심, 탐욕'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했다. 어휘력을 측정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밀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질문과 그날의 씁쓸함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처럼, 내가 면접관 자리에 오르고부터 똑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단어의 뜻을 제대로 구분하여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양과 자격이 엇비슷한 입사 지원자가 여러 명일 때면 누구를 선정하면 좋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때로는 대답 하나로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괜찮게 생각되던 어느 여성 입사 지원자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눈빛이 서글서글한 그녀는 "혹시 금어초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 꽃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로 모른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꽃 모양이 금붕어를 닮아 '금어초'라고 하는데, 레이스가 달린 듯 아름다운 꽃이 시들어 말라가면서 해골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악마의 꽃' 또는 '해골 플라워(skull flower)'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꽃말은 '욕망, 탐욕'인데, 건강한 욕망은 꿈이며 희망이기에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지만, 도가 지나쳐 탐욕의 단계로 들어서면 급속도로 무섭고 끔찍한 해골처럼 변한다는 설명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굉장히 재치 있는 대답이었고, 꽃과 꽃말, 피어 있을 때와 시들었을 때의 모습을 빗대어 욕망과 욕심을 탁월하게 설명한 것 같아 그 대답을 듣고 그녀를 낙점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을 만나면서 많이 배운다. 통찰력과 분별력 있는 손윗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많지만, 지혜로운 손아랫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인간이 탐내는 것은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탐하며, 좋은 집과 고급 승용차, 백화점에 진열된 진귀한 보석류와 값비싼 의류, 각종 상품을 소유하려고 애쓴다. 재물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 있는 사람까지 소유하려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아흔아홉 개를 가지고도 한 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려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탐욕이란 이름으로 통칭하는 '아귀(餓鬼)'의 잔인한 목마름은 끝도 없고 지치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이 산 저 산의 나무를 다 잡아먹고도 항상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궁이와 같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도 같다.
승려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걷다가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이 남긴 화두는 '무소유'이다. 그분의 산문집 『무소유』에 담긴 골수는 바로 '맑은 가난'인데, 영혼이 깨어 있으려면 가난이 필수조건이라고 넌지시 귀띔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불필요한 것을 가지면 그것에 얽매여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인 『탈무드』에는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며 숨을 거둔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가 죽기 전, 신하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운구할 때는 두 팔을 관 밖으로 내어놓아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지만,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모두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억만장자라도 한 푼 챙겨 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천년을 살 것처럼 움켜쥔다. 결국 욕심 때문에 추락하고 조롱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의 에리직톤은 곡물의 신 데메테르의 나무를 베었다가 저주를 받아 끝없는 허기로 자기 몸을 뜯어먹다 죽었다.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신들의 세계에 오르려다 추락해 절름발이로 전락했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다.
루소는 말했다. “욕망은 우리를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우리의 불행은 거기에 있다.”
인생에는 임계점이 있다. 물이 99도에서 끓지 않듯, 인간도 적당히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욕망이 넘치는 젊은 날엔 욕망을 채워야 하지만, 늙어서는 욕망을 비워야 한다. 그렇게 채우고 비우는 사이에,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