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명확하지 않은 마음이 언어를 흐릴 때
편집자로 살며 수만 권의 원고를 마주하다 보면, 유독 고집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교정지 위에 빨간 펜으로 ‘흐리멍덩’이라고 바로잡아 놓아도,
며칠 뒤 작가에게서 돌아온 원고에는 다시 ‘흐리멍텅’이라는 글자가 당당히 박혀 있곤 한다.
어떤 작가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편집이사님, ‘멍텅구리’라는 말도 있는데 ‘흐리멍텅’이 더 입에 붙지 않나요?”
그럴 때면 나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최승자 시인의 한 구절을 갈피에 끼워 보낼 뿐이다.
시간은 흐리멍덩 이렇게도 지나가고 저렇게도 지나간다 우리의 꿈들도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지나간다.
_최승자, 〈시간은 흐리멍덩〉
결론부터 말하면, 정신이 맑지 못하거나 상태가 분명하지 않을 때 쓰는 바른 표현은 ‘흐리멍덩하다’다.
‘흐리멍텅하다’는 일상에서 훨씬 많이 쓰이지만, 국립국어원 기준 남한 표준어로는 비표준이다. 사전은 이를 ‘흐리멍덩하다’의 잘못으로 처리하고, 북한 문화어에서는 ‘흐리멍텅하다’를 표준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꾸 ‘멍텅’에 손이 가는 걸까.
‘텅’이라는 소리는 ‘텅 비다’, ‘텅텅 울리다’처럼 공허하고 느슨한 느낌을 강하게 남긴다.
입안에서 힘을 덜 들이고도 술술 흘러나오는 소리다. 그래서 ‘흐리멍텅’이 ‘흐리멍덩’보다 더 흐릿하고,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멍청하다’나 ‘멍텅구리’의 잔상이 ‘텅’을 더 자연스럽게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편집자의 눈에는 ‘흐리멍덩’이 하나의 경계선처럼 보인다.
정신의 초점이 흐려질 때, 문장의 끝이 애매해질 때, 우리는 늘 이 경계 근처에서 말을 헐겁게 놓친다.
그럴 때일수록 정확한 소리를 붙잡아야 한다. ‘멍텅’으로 흘러가려는 손을 멈추고 ‘멍덩’이라고 적는 것.
그 사소한 선택 하나가 흐리멍덩해진 감각을 다시 불러 세운다.
최승자 시인의 〈시간은 흐리멍덩〉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증거다.
시간도, 꿈도 ‘흐리멍덩하게’ 지나간다.
붙잡히지 않는 삶의 상태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시의 호흡은 분명히 ‘덩’의 여운 위에 서 있다.
만약 ‘흐리멍텅’이었다면 리듬과 정서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시인은 사전을 먼저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시는 언제나 가장 정확한 소리 위에 선다.
최승자가 고른 ‘흐리멍덩’은 그래서 하나의 증거가 된다.
말이 흐려지면 생각에도 이끼가 낀다. ‘흐리멍덩’을 ‘흐리멍텅’으로 방치하는 작은 느슨함이 쌓이면, 결국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문장이 된다. 정확한 단어 하나를 고르는 일은 사전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점검하는 일이다.
� 한 줄 기억법
표준어 : 흐리멍덩 (O)
비표준 : 흐리멍텅 (X)
쉽게 외우는 팁
사람이 멍청할 때는 ‘멍텅구리’지만, 상태가 흐릿할 때는 안개 덩어리를 떠올려라. 그래서 흐리멍덩이다.
교정지 위에서 ‘덩’ 자를 한 번 더 눌러 쓰는 순간, 나는 늘 생각한다.
내 삶도, 내가 만드는 문장들도 부디 흐리멍덩한 상태로 대충 지나가지 않기를.
명확한 단어 하나가 흐릿해진 정신을 깨우는 작은 죽비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