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그 영원한 밤하늘의 조력자

제3화_편집자의 시간, 사라지지 않는 소명

by 축성여석

책상 앞의 별을 바라보며

40여 년 전, 내가 출판계에 발을 들였을 때는 백발의 편집자들이 책상에 앉아 묵묵히 교정을 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파주 출판도시의 한 카페에서 들려온 젊은 편집자들의 대화는 현실의 씁쓸함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 오십 넘은 편집자가 있을까요?”

“출판계에선 마흔이 정년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외환위기 이후 출판계는 급변했다. 출판사는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경험 많은 편집자들은 하나둘 밀려났다. 그 자리는 빠르게 젊은 인력으로 채워졌고, 외주 프리랜서 중심의 시스템이 확대되면서 편집의 가치는 점차 하락했다.

하지만 그런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진짜 편집자의 정신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다. 이 글은 40년 동안 편집의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길을 걷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편집자의 본질과 방향을 전하려는 마음에서 작성한다.


편집자의 기본 소양: 언어 감감과 끈기

1980년대 중반, 내가 처음 편집부에 들어갔을 때의 풍경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담배 연기로 자욱한 사무실에서, 머리 희끗한 선배들이 원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세계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3년간 실무를 익히며, 인쇄 시스템까지 몸으로 배웠다.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어 실력이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기본이고, 어문 규범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나는 부지런히 사전을 뒤지며 교정을 봤지만, 늘 베테랑 편집주간님의 손을 거치면 오류가 드러났다. 그는 특히 일본어 잔재에 민감했고, 언론·출판계에 남은 오염된 언어를 지적하며 자주 말했다.

“편집자는 작가보다 어문 실력이 더 뛰어나야 해. 그래야 책을 제대로 만들 수 있지.”

그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 생기면 전문가에게 전화하고, 도서관에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런 자세는 장인의 집요함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지적 호기심도 좋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엉덩이가 무겁다는 거야. 편집자는 의자에서 오래 버티는 인내심이 필요하지.”

그 밑에서 배운 교정·교열의 기술, 그리고 끈기와 집중력은 내 편집자 인생의 기반이 되었다.


편집자의 역할: 기획의 직감, 설득의 기술, 그리고 우연을 잡아채는 용기

히트작 하나 없이 숨만 쉬던 출판사. 그 출판사의 편집장이 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되뇌었다. 영세한 출판사에서 유명 작가의 원고를 구한다는 건, 사막에서 우물 파는 일만큼 어렵다. 친분 있는 작가에게 부탁을 해도, 돌아오는 건 대개 ‘침묵’이나 ‘미안하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사동의 허름한 주점. 거기 모인 몇몇 작가들과의 술자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술에 얽힌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어떤 이는 연인과의 이별 후 술에 취해 유리창을 부쉈고, 또 다른 이는 필름이 끊긴 밤에 경찰서에서 눈을 떴다고 했다. 모두 자학적이면서도 묘하게 유쾌했다. 나는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이거 에세이로 한 편씩 써 주시면 안 됩니까? ‘술’이라는 주제로 엮어서 한 권 만들자고요.”

순간 술기운도 한몫했을까. 그들은 모두 "그래, 재밌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자기와 친한 문인이 적격이라며 서로서로 추천도 했다. 그 자리에서 ‘계약’이 이루어졌다.

며칠 후, 한 사람씩 원고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 작가가 우리 출판사에 글을? 평소엔 원고 요청하면 “지금은 곤란하다”라며 빠져나가던 이들이었다. 나는 숨죽이며 교정을 봤고, 책은 『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초판 3,000부는 사흘 만에 동났다. 전화로 재고를 묻는 서점 직원들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뜨겁게 했다.

출판사 사장은 회식 자리에서 “이거 홈런이야, 홈런!”이라며 연신 내 잔을 채웠다. 그 이후였다. '작가 만나러 가라'며 회사 카드를 쥐여주던 사장이 “낮술도 괜찮다”는 허락까지 떨어졌다.

『술 2』, 『술 3』이 연달아 나왔다. 여세를 몰아 『내가 만났던 가장 멋진 남자, 내가 만났던 가장 멋진 여자』라는 책도 출간했는데, 그 역시 불티나게 팔렸다. 이후 ‘질투’, ‘사랑’, ‘내 탓이오’ 등 감정 중심의 테마 에세이가 이어졌고, 출판사의 매출은 몇 배로 뛰었다.

그 경험은 내게 편집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단순한 교정 기술만이 아님을, 기획력과 인간관계, 그리고 한순간의 직감을 놓치지 않는 용기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가르쳐주었다.


교열은 창작의 연장선: 존중과 절제

출판사에 도착하는 원고 중, 큰 손질 없이 바로 출간할 수 있는 글은 극히 드물다. 문맥의 어긋남, 논리 비약, 어휘의 부정확함 등은 편집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러나 편집은 단순한 수정을 넘어서 창작의 연장선에 있다.

내가 존경하던 편집주간은 말했다.

“편집자는 외과의사처럼 신중해야 한다. 엉성한 빨간 펜은 작품을 죽일 수도 있어.”

작품은 작가가 만든 소우주다. 그 세계를 훼손하지 않고, 작가의 목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글을 다듬는 것, 그것이 진짜 편집자의 실력이다. 손을 대되 손댄 티가 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편집이다.

일본의 편집자 와시오 겐야는 “편집자는 책 만드는 모든 과정에 쓸 데 있게 참견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기획, 원고 검토, 교열, 디자인, 홍보, 인쇄까지, 편집자는 전 과정을 조율하며 책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은 철저히 그림자 역할에 머무른다. 이름은 드러나지 않지만, 손길은 책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편집자는 책의 설계자이며, 조용한 창조자다.


출판계의 현실, 그리고 꺾이지 않는 신념

출판 노동자의 이직률은 지금도 높다. 고학력자들이 모여 일하지만, 열악한 환경은 여전하다. 지금도 계약서 없이 일하고, 예고 없이 해고당하며, 야근 수당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책을 좋아했고, 만드는 일이 적성에 맞았으며,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출판계에는 대체로 정년이 없다. 그만두는 날이 곧 정년이다.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많은 편집자가 늘 불안 속에 살아간다. 실력 있는 이들은 다른 업계로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끼리 자조적으로 “쭉정이만 남는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남아 있는 이들은 결코 쭉정이가 아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의식과 실력을 지닌 '알곡'들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마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처럼, 이들은 고급문화의 씨앗을 지키기 위해 책이라는 꽃을 피우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1인 출판이나 자회사 설립 같은 독립 창업의 바람도 불고 있다. 나 역시 수없이 창업을 고민했지만, 결국 편집자로 남기로 결심했다. 장사꾼이 되는 순간, 글과는 점점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나에게 가지 않은 길은 바로 ‘출판사 사장이 되는 길’이었다.


다시, 후배들을 위한 희망의 말

찬 바람 부는 벌판을 떠도는 백발의 편집자들. 나는 그 모습에 종종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몇몇 출판사와 뜻있는 인사들이 노동 환경 개선과 전문성 계승에 대한 의미 있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영국인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출판계엔 시니어 에디터가 많아요. 직책도 없고 야망도 없지만, 그들은 그저 책을 더 잘 만들기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기 노하우를 기꺼이 넘겨줘요.”

그 말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것이 편집자의 아름다운 미래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언젠가 우리 출판계에도 그런 풍경이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길을 만들고, 또 누군가 그 길을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이 척박한 토양에도 좋은 책이 자라나는 숲이 조성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묵묵히 책상 앞에 앉아, 작가의 문장을 다듬는 조력자로 남아 있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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